가슴이 두근거리고 열이 올라온다. 눈 밑이 파르르 떨린다. 야차 같은 나의 밑바닥 모습이 올라오려고 한다. 하지만 강의 중이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 감정과 감각을 알아차리며 내면을 바라본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당황, 안타까움, 분노, 그리고 약간의 억울함이다. 타인을 향해 공격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리고 틀렸다고 말한다. 타인이 틀려야 자신은 옳은 게 된다고 믿는 듯하다. 우리는 누구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살아온 방식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하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선이 있다. 넘지 말아야 하는, 인간이라면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인간이라면’의 기준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강의로 만나는 참가자들이 다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강의를 바라보는 시선과 기대가 저마다 다르다. 나는 나와 참가자의 말하는 비율을 6:4 혹은 5:5 정도로 생각하고 교안을 만든다. 참가자들이 안전하다고 느끼면 참가자의 말하는 비율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을 좋아하는 참가자도 있고 강연 형태의 지식 전달 강의를 바라는 참가자도 있다. 그 사이에서 지혜롭게 조율하고 나의 의도를 잘 전달하는 게 강사인 나의 몫이다.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생각하나?’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모두의 기대가 늘 일치하지 않는다. 때로 내가 말하는 비율이 생각보다 많아질 때가 있다. 참가자 사이의 역동이 충분히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는 편안하게 강사의 생각을 듣기만 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다양성 측면에서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다. 다름을 표현하는 방법, 기대와 다른 상황에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방식이 그 사람의 많은 것을 드러낸다. 가치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말, 표정, 몸짓, 억양으로 한 사람이 그동안 살아온 역사를 반영한다.
얼마 전에 만난 한 참가자를 보며 많은 생각이 올라온다. 한 사람의 신념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올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타인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는 것은 무지인가 아니면 악인가? 자신이 가진 권한을 휘둘러 군림하고자 하는 생각은 어떤 결핍에서 올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온 몸으로 알리고 있는 이에게 문득 연민이 느껴진다. 나에게 증명을 요구하는 그에게서 자신을 증명해야만 했던 그의 인생이 보이는 듯하다. 김찬호 교수의 책 <모멸감>에 나오는 것처럼 자신의 결핍과 공허를 채우기 위해 타인을 모멸하는 것은 아니었을지 추측한다. 누군가를 무시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해야 하는 그가 문득 안쓰러워지는 순간이다.
강의 두 시간 중 적지 않은 시간이 오늘 주제와 먼, 감정 에너지를 소모하는 데 쓰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강의 주제인 ‘세상의 편견에 맞서다’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을 향해 쏟아 놓는 많은 말들이 자신의 편견과 아집을 상당 부분 보여주기 때문이다. 편견에서 멀어지려면 내가 말하는 순간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하는 이 말이 나의 어떤 편견과 연결되는구나’ 혹은 시간이 흐른 후에라도 자신의 말과 행동에 들어 있던 의미를 발견하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 수밖에 없다.
글을 쓰며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고 흘려보내려 했는데 오히려 박제해 놓은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덕분에 흥분으로 날뛰던 심장박동은 안정되었고 체온도 내렸으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다. 내가 포용력 있고 조금 더 단단한 내면을 가지게 되면 내 마음과 몸을 추스르는 시간이 조금 더 빨라지겠지. 다름을 인정한다는 게 참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