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2019년 추석이 지난 직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의 변화를 보며 죽음이 두려웠다. 남은이의 슬픔이 너무 무거워서. 그 슬픔 속에는 후회, 죄책감, 미안함, 자책의 마음이 뒤섞여 있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내도 마음에 넓게 자리 잡은 죽음의 여파는 옅어질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문득문득 죽음이 떠오른다. 맛있는 것을 먹고 웃음이 차오르는 순간순간 행복과 즐거움이 멈칫한다. 끝을 모르고 내달리던 행복과 기쁨의 감정이 자꾸만 급정거를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지난주 막내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다시 많아졌다. 50대 젊은 나이의 외삼촌은 굉장히 건강하고 건장하셨다. 체격도 좋아서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 감기 한번 안 걸리는 건강체질. 그러던 중 갑자기 진단받은 암. 온몸에 전이되어도 몸은 모를 수 있다. 항암치료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겉으로 티 하나 나지 않았다.
외삼촌이 세상에 남긴 한 생명, 열아홉 살 아이는 허망하게 아빠를 보냈다. 장례절차도 낯설다. 선산에 자리를 만들고 떼를 입히고 아빠를 보내는 모든 과정에서 주체가 되지 못한다. 모르니까. 장례를 어떻게 치르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까. 가문 어른들의 배려가 잔잔히 느껴진다. 그런데 장례 절차가 진행될 때 충분히 슬퍼하고 슬픔에 머물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아이의 마음이 걱정이다. 충분히 울지 못하고 정신없이 보낸 아이의 마음이.
아이를 간절히 기다리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덜컥 생겨 멈추게 되는 이유는, 남은 이에 대한 걱정과 죄책감. 생기지도 않은 아이에게 벌써 미안해서다. 이렇게 빨리 갈 거면 왜 낳았냐고 원망하고 슬퍼하고 좌절할 아이를 상상하며 겁을 낸다. 땅에 떨어진 수유나무 열매를 보며 "모든 과정은 쓸모없게 되는 걸까?"라고 말하던 이치코(영화 <리틀 포레스트 : 여름과 겨울, 가을과 봄>의 주인공)의 독백이 생각난다. 온 에너지를 다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을 수유나무는 땅에 떨어진 열매가 다시 뿌리내리고 나무가 될 것을 몰랐어도 담담했을까?
부모가 된다는 건, 감당하지 못할 영역까지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나는 내가 꽤 단단하고 강한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여리고 약하다. 감당하지 못할 것을 외면했기에 내가 강한 줄 알고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을수록 지금을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는다. 어릴 때는 몰랐던 미묘한 부분들을 알게 된 지금, '차라리 몰랐다면 좋지 않았을까' 의미 없는 투정을 허공에 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