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리틀 포레스트 : 겨울과 봄
“설탕을 넣는 건
팥이 손가락으로도 쉽게 으깨지고 나서다.
그전에 설탕을 넣으면 아무리 쪄도
팥이 물러지지 않는다.
조바심을 내는 건 금물이다.”
_ 이치코 <리틀 포레스트:겨울과 봄>
Q. 조바심이 나지만 가장 좋은 때를 위해 기다리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A.
팥도 으깨지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설탕을 맞이하기 전에 일단 뜨거운 물에서 푹푹 끓어야 한다. 팥이 말할 수 있다면 소리를 지르고 있겠지? 팥죽이 되는 게 꿈이어서 그 뜨거운 시간들을 참아낸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 조그만 팥도 시간과 열이 필요한데 이 거대한 인간은 오죽할까.
작년 여름에 이 질문을 만났을 때의 답은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이미 노산이라서 아무리 빨라도 늙은 엄마 확정이라는 생각에 조바심이 나지만 가장 좋은 때에 엄마가 될 거라는 그런 답을 적었다. 지금도 그 마음이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나는 우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인생 최대 목표가 되었다. '좋은'이라는 형용사는 참 애매하기 그지없는 단어다. 마치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할 때의 그 '좋은' 같아서다. 인구수만큼의 '좋은'에 대한 해석이 있겠지. 나에게 '좋은'은 그릇이 크고 지적으로 깊이 있으며 따뜻하고 겸손한, 이라는 뜻이다.
예전에 나의 '좋은'은 유익한, 도움이 되는,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필요한 사람, 쓸모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시선은 좀 위험하다. 그 무렵 나를 힘들게 하는 나의 내면을 향한 시선은 '잉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잉여'는 쓸 만큼 쓰고 남는, 필요한 것 이상의, 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그 뜻은 사실 풍요에 더 가깝다. 그런데 그 단어가 사람 앞에 붙으면 '잉여 인간'이 된다. 남는 인간. 썩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다. 마치 불청객 같고 눈칫밥 먹는 자리가 떠오른다. 그래서 지금은 좀 다르게 생각한다. 필요하고 쓸모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그 단어가 사람 앞에 붙는 것은 경계한다. 필요한 사람은 필요 없는 사람을 전제하고 쓸모 있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을 전제하니까.
그리고 지금 나에게 '좋은 사람'은 필요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따듯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온탕에 몸을 담그면 몸이 노곤 노곤해지듯 편안해지는 그런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편안하고 다정한 사람이고 싶다는 말이다. 이런 바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나는 여전히 차갑고 뾰족하다. 그런데 이런 소망이 생겼다는 것은 내 안의 차가운 빙산들이 조금은 녹고 있다는 증거겠지. 굳이 다 녹여버리려고 목표를 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빙산도 때로는 필요할지 모르니.
좋은 사람들을 떠올리면 분명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보편성이 있다. 따뜻하고 편안함을 주는 그런. 그리고 그들만의 독특성도 떠오른다. 나는 내가 가진 차가움의 상징인 빙산들을 나의 독특성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미움받을 용기, 지적인 날카로움, 책임감을 수반하는 끈기 같은. 모두에게 사랑받겠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유한하고 사람은 모두 다르니 나는 이제 선택과 집중을 해야겠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어쨌든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나이를 먹으며 연륜이 쌓이고 조금씩 다듬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조바심은 나지만 가장 좋은 때는 어쩌면 지금이고 어쩌면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시간이 천천히 간다면 천천히 나이 드는 기쁨을 시간이 빨리 간다면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기쁨을 누리겠다. 어찌 되었든 나의 승리다.
<하루 10분, 영화에서 건져 올린 질문으로 글쓰기> 프로젝트를 100일 동안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루 10분 짧은 시간에 떠오른 생각을 인스타그램에 매일 정리합니다. 그 글들을 씨앗 삼아 브런치에서 하나씩 심어 보기로 했습니다. 나도 몰랐던 나를 알게 되는 과정이 되리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