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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다서영 Aug 09. 2023

전화벨, 3분

짧은 이야기(소설)

전화벨, 1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몸 숨길 데 하나 없는 반지하 단칸방이 요란한 전화벨 소리로 들썩인다. 아무리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려도, 미친개처럼 짖어대는 전화벨 소리는 귓구멍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 들어왔다.

‘받아야 해.’

분명히 내가 집에 있는 걸 알고 건 전화였다.

나는 누렇게 변해버린 오래된 전화기를 향해 힘겹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부들부들 떨리던 오른손은 허공에서 잠시 머물다 툭 떨어진다.

‘더는 못할 것 같아.’

나는 오른손을 질질 끌고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리고 장롱 안, 꼭꼭 숨겨놓았던 적금 통장을 꺼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경이 끊어진 것처럼 끌려오던 오른손이 적금 통장을 마주한 순간, 나비의 날갯짓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얼마 후면 만기인 통장.


나는 손가락 하나하나로 적금 통장의 감미로운 표면을 음미해 나갔다.

‘좋다.’

적금 통장은 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겨둔 건데, 어떻게 알아냈을까? 설마 할머니가?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얼마 전, 할머니에게 월급 명세서까지 보여주면서 더는 나올 돈이 없다고 하소연을 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절대로 아니다.

‘그럼 그 문자는 뭐였을까?‘

[돈 보내라. 천만 원, 계좌번호 100-000-002, 한국은행.]

문자에는 정확히 천만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떻게 안 걸까?

또다시 엄습한 불안감에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아얏.”

손톱 끝자락에 송골송골 피가 맺힌다.

‘으이그, 애도 아니고, 이리 내봐. 반창고 붙여줄게.’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불안하면 손톱을 물어뜯던 나의 습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고등학교 때 친구, 영지였다. 영지는 내가 손톱을 물어뜯을 때마다 나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나는 영지의 손을 잡고 있는 동안은 손톱을 물어뜯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친구를 보잘것없는 자격지심으로 잃어버렸다.


대학생이 된 영지와 돈을 벌어야 했던 나.


'공부도 내가 훨씬 잘했는데, 누구는 대학생이 되고, 누구는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고. 억울해.'

진심으로 억울했다. 취업기념으로 할머니가 시장에서 사다 준 몇천 원짜리 원피스를 입고 출근하던 날, 영지는 대학 합격 선물로 받은 값비싼 백화점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학교에 간다며 환하게 웃던 영지의 미소에서 나는 악마를 보았다. 당시에 영지는 나에게 악마였다. 악마는 싸구려 원피스를 입은 나를 차갑게 비웃고 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영지를 매몰차게 외면했다. 영지의 상처 입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내 안에 있던 악마는 환호했었다.


“다 그놈 때문이야.”


그놈은 어릴 때부터 사고만 치고 다녔다.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공부하고는 인연이 없던 놈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잘 돼야 집안이 산다며 할머니는 모든 재산을 그놈에게 쏟아부었다. 부모님 사고 보상금에 그나마 남아 있던 논밭까지 그놈 주머니에 탈탈 털어 넣었다. 구부정한 허리로 남의 집 농사를 거들면서 한 푼 두 푼 모은 쌈짓돈마저 다 그놈 손에 쥐여줬다.

‘대학은 왜 가겠다고 해서.’

지방의 이름 없는 대학이라도 가겠다는 그놈의 말에 할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대학 등록금이 한두 푼도 아니고, 거기다 기숙사 비용에 용돈까지, 그놈의 주머니가 두둑해질수록 내 희망은 점점 사그라져갔다.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던 내가 실업반을 신청했을 때, 담임선생님은 극구 만류했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간 실업반이었지만, 같이 아파해주시던 선생님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나중에라도 대학은 꼭 가라고 용기를 주셨던 선생님.


그 말 한마디에 힘을 낸 결과가 지금 내 오른손 안에 쥐어진 적금 통장이었다.


전화벨, 2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또다시 전화벨이 울려온다. 어서 통장을 내놓으라고, 마지막 희망을 내놓으라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댄다.

‘내놓으라고? 내 통장을? 내 희망을? 웃기지 마. 이 돈이 어떤 돈인데, 그놈한테 또 뺏기라고.’

으드득 이를 갈았다. 점점 숨이 거칠어진다.


그놈은 대학 2학년이 되자, 기숙사를 나와서 근처 오피스텔에 방을 잡고는 할머니를 데려갔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피스텔 전세금. 어릴 때부터 친 사고 수습에 대학 등록금까지, 여윳돈이 없던 할머니는 집을 팔아서, 그놈의 오피스텔 전세금을 마련했다.

그놈이 햇볕 잘 드는 방 두 개짜리 오피스텔에서 여자친구와 동거하며 유유자적 삶을 즐기고 있을 때 나는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반지하에서 월세를 마련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심지어 월급의 반은 그놈 용돈으로 사라졌다. 나의 생활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욱.”

갑자기 토기가 올라왔다.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던 토기가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에 턱 멈춘다. 그와 동시에 내 심장도 멈춰버렸다.

'숨이, 숨이 쉬어지지 않아.'

두 손으로 목구멍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여자친구가 임신했다는 그놈의 말이 떠올랐다.

임신, 임신이라니? 아이를 낳으면 할머니한테 보낸다는 말에 어쩔 수 없어서 수술 비용을 보내야 했다.

수술 비용을 보내던 날, 나는 꿈을 뀠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로 아주 작은 아이가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녀린 목소리로 외쳤다.

‘고모, 살려줘. 고모.’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화장실 바닥에 엎드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죽였어. 내 몸 하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너까지 키울 자신이 없었어.'

처음이 어려웠지, 다음부터는 쉬었다. 그 이후로 나는 두 번이나 더 조카를 보내야 했다. 마지막은 세상에 온 지 5개월도 넘은 아이였다. 나는 여자아이라는 성별도 알 수 있는 뱃속의 조카를 보내기 위해 또다시 돈을 보냈다. 그놈이 나를 향해 말했다.

‘여자아이라네, 킥, 너 같은 년 나온다는 보장만 있다면, 낳으라고 하는 건데.’

또다시 숨이 막혀왔다.

“개자식, 개자식, 개자식.”

화장실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더럽다.


살인자의 눈물.

그것도 제 조카를 죽인 살인자.


나는 엉금엉금 화장실을 기어 나왔다. 여전히 전화벨은 사납게 울리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데!”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화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기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미친 듯이 울어대던 전화기가 와당탕 소리를 내며 입을 닫았다. 드디어 조용해졌다. 그래,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진작에 인연을 끝냈어야 했는데.


일 년 전쯤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문을 여는데 할머니의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방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할머니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더욱더 목놓아 울었다. 순간 할머니의 얼굴에서 그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왜? 또 뭐야?’

착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할머니는 움찔했지만, 곧바로 내 손을 잡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구치소에 있단다.’

'누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놈의 이름이 들려오자, 왠지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년아. 지금 오라버니가 구치소에 갔다는데 웃음이 나와?’

'그럼 울어?‘

‘아이고, 이런 독한 년. 이런 독한 년.’

평상시였으면 내 등 짝을 내리쳤을 텐데, 할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뭔가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나 돈 없어.’

‘그럼 그대로 두자는 소리야? 우리 집 장손을?’

‘할머니네 집 장손이겠지. 나한테는 아니야!’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왔지만, 결국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구치소로 갔다. 면회시간이 십 분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할… 머니.’

‘아이고, 아이고.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아이고.’

절대 할머니 때문은 아니었다. 초췌한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그놈한테 흔들리고 말았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가 팍 죽은 모습. 면회실로 들어서자마자 내뱉어 주리라 다짐했던 독한 말들이 사르르 사그라져갔다.

‘얼마야.’

그게 다였다. 나는 십 분 동안 그 말 한 마디하고 나왔다. 그리고 어렵게 모아뒀던 푼돈과 은행 대출, 회사에 사정사정해서 가불 받은 몇 달 치 월급을 들고 빚쟁이를 찾아갔다.

‘사기꾼 같은 놈. 그놈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아주 이가 갈린다고.’

거만하게 꼰 다리와 붉게 물든 입술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 절대 합의해 줄 수 없다는 고압적인 여자의 얼굴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쳐다보면, 뭘? 그렇다고 내가 겨우 이 돈으로 합의해 줄 것 같아? 내가 그놈한테 뜯긴 돈이 얼만데?’

‘그렇겠죠. 턱도 없겠죠. 그럼 그놈한테 받으세요.'

나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봉투를 끌어당겼다.

‘뭐, 뭐?’

여자가 내 손을 쳐내며, 급하게 돈봉투를 채 갔다. 그리고 한마디를 던진다.

‘그쪽도 참 불쌍하다. 그런 놈을 오빠라고 두다니. 하여튼 나니까 이 정도지, 사채 썼으면 끝장이었다고. 어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장기나 적출당했겠지. ’


사채? 장기?!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설마 그놈 사채 끌어 쓴 거 아니야?'

그놈을 구치소에서 빼준 이후, 나는 몇 달 동안 수입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놈한테 주던 용돈을 자연스럽게 끊을 수 있었다. 그놈과의 연을 끊을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놈이 구치소에서 나와서 뭘 먹고 사는지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일부러 신경을 끊고 살았다. 할머니의 한숨이 틈틈이 들려왔지만, 억지로 무시했었다.

그런데 ‘사채라니. 거기다 장기 뭐?’

무심히 내뱉었던 여자의 말이 온몸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진짜 그런 상황이면 어떡하지? 신용이 바닥이니 은행 대출은 상상도 하지 못할 거고. 그렇다고 변변치 않은 그놈이 어디 가서 번듯한 일자리를 얻을 리는 만무하고, 무엇보다 그놈 성격에 누구 밑에서 일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하아.”

그놈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행복할까?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우리도 남들과 다름없는 살가운 남매였다.


‘야, 내 동생 때린 게 너야?’

‘그래. 어쩔래.’

‘이 자식이. 누가 내 동생을 때리래.’

왜 싸웠느냐며 종아리를 내리치는 아버지 앞에서 오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빠는 시퍼렇게 멍든 얼굴을 쓱쓱 마른 손으로 문지르며 나를 향해 입 모양으로 조그맣게 말했다.

‘이제 그 자식들, 너 안 괴롭힐 거야.’

나는 엉엉 울면서 종아리를 내리치는 아빠의 팔뚝을 붙잡고 늘어졌었다.


갑자기 그런 오빠가 피투성이가 돼서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앞에는 몽둥이를 든 낯선 덩치들이 오빠를 둘러싸고 있었다. 오빠는 한 번만 전화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덩치들 앞에서 굽혀지지 않는 무릎을 억지로 굽히고 있다. 덩치 중 하나가 오빠에게 휴대폰을 던진다. 오빠가 힘겹게 휴대폰의 번호를 누르기 시작한다.

‘오빠!’

나는 서둘러 널브러져 있는 전화기를 집어 올렸다. 그리고 재빠르게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곧 다시 전화벨이 울릴 것이다. 오빠가 전화를 걸어올 것이다.


전화벨, 3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왔다! 나는 서둘러 수화기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들어야 하는데, 어서 전화를 받아야 하는데, 오빠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왜 안 움직여지지?

나는 굴러다니는 적금 통장을 바라보았다.

'내 희망. 나를 지탱해 준 버팀목.'

수중에 돈이 천 원이라도 생길 때마다 저금했었다. 그리고 수능 준비도 시작했다. 할머니한테는 야근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퇴근 후 동네 구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비록 세 시간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정말 꿀 같은 시간이었다. 주말에는 할머니를 도와서 폐지를 주워야 했기에 주중 하루 세 시간이 나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일 년 안에 합격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최소 2년은 준비할 생각이었다.

“훗, 내 주제에.”


그 옛날 나를 보호하던 오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빠가 말했다.

‘우리가 없으면 이 세상에는 너희 둘밖에 없어. 서로의 보호자가 되어야 해.’

하지만, 우리는 너무 어렸다. 특히, 오빠는 더욱 그랬다. 오빠는 당시 사고 현장에 같이 있었다. 엄마, 아빠 모두 오빠를 살리기 위해 몸을 던졌다. 오빠는 살았고 두 분은 돌아가셨다. 오빠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 오빠도 불쌍한 놈이지.

그런데 나는? 나는 안 불쌍해? 지금 이 수화기를 들면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이어가겠지. 우울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언제나처럼 거리를 헤매고 다니겠지. 할머니의 울음소리를 배경 삼아 오빠의 주머니에 내 심장을, 손과 발을, 내 온몸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삶이 계속될 거야. 분쇄기에 조각나는 종이처럼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를 간신히 붙들고 힘겹게 살아가겠지.


이제는 숨도 막혀오지 않았다. 숨을 쉰다는 건, 그저 코와 입으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일련의 습관적인 행동일 뿐, 몸뚱이가 사라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고통이었다.

‘그래. 이게 내 최선이야. 나는 할 만큼 다 했어.’

부모님이 목숨을 걸고 살린 오빠였다. 오빠는 부모님의 대신 살아야 했다. 오빠를 죽게 할 수는 없었다.

‘... 그럼 내가 가면 돼.’

오빠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죽지 못해 사는 사람처럼,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게 부모가 남겨준 오빠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선택할 수 있었다. 엄마도 아빠도 나를 위해서 희생한 건 아니니까. 불쌍한 할머니가 마음에 걸리지만, 할머니도 나보다는 오빠가 곁에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내일은 회사에 퇴직서를 제출해야겠어.’

힘든 시절, 나를 받아준 유일한 곳.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고 자주 빠질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자수성가한 사장은 내 사정을 충분히 이해해 주었다.

‘지희 씨 이제 그만해요. 지희 씨가 이렇게 해주면, 아이고 고맙습니다. 동생님. 할 것 같아요? 오빠는 또 그런 짓을 저지를 거라고요. 뒤에서 이렇게 다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했는데, 그걸 나와 할머니가 막았다.


오빠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누구를 탓하겠어. 내가 저지른 짓은 내가 마무리해야지.’

퇴직금을 받으면 조금 나은 집으로 이사해야겠다. 할머니를 햇볕도 들지 않는 반지하에 계속 둘 수는 없었다. 아니면, 할머니 고향에 버려진 빈집을 수리해서 살아도 괜찮겠다.

'내가 없어도 동네 사람들이 잘 챙겨줄 거야.'


전화벨이 멈추기 직전


나는 드디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기다렸다. 오빠의 울부짖는 목소리를, 사납게 짖어대는 누군가의 협박을, 이제는 아무 상관없다. 포기한다는 게 이렇게 홀가분한 거였다니, 진작에 포기하지 않음을 후회했다.

“여보세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아까 전화기를 집어던져서 고장이 난 건가? 잠시 후, 지지직거리는 소리 너머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가 이 지희 씨 집인가요?”

“네. 맞습니다.”

내 이름이 들리자 편안했던 심장이 갑자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여기는 한국대학교입니다. 본인 맞으시죠?”

"네?"

"한국대학교 추가합격 소식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그 순간,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리며 강하게 울려 퍼졌다.


지희야, 과거의 불행이 미래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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