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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다서영 Aug 27. 2023

새로운 길

짧은 이야기(소설)

“이런. 버스를 잘못 탔네. 분명히 200번으로 봤는데.”

버스 안 한쪽 구석에 붙여진 버스노선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잘못 탔다는 것을 알았다.

‘뭐, 200번이든 300번이든 어차피 가고자 하는 방향은 비슷하니까 상관없겠지.’

나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한낮의 따스한 햇볕에 노곤해진 몸을 늘어트렸다. 얼마 전, 십 년 넘게 다니 회사를 그만뒀다. 직장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되어 있던 몸과 마음이 지금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다. 갑자기 잘못 탄 버스처럼 내 인생도 잘못된 길로  것 같아서 불안해진다.

"그냥 내려야겠어."

나는 축 늘어져 있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후,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낯선 거리, 낯선 동네.


휴대폰을 꺼내서, 목적지를 검색했다.

걸어가면 한 삼 십분 정도 걸리겠네. 운동 삼아 걸어가야겠다.

나는 아랫입술을 앙 깨문 채, 낯선 거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불현듯 '이 동네에 모텔이 많아서 다닐 때마다 불안해 죽겠어.'라고 불평을 늘어놓던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냥 돌아갈까? 하지만, 돌아가면 한 시간 이상은 걸리는데, 그렇다고 버스를 다시 타는 건 죽어도 싫고,

 "그냥 가자, 한낮인데 뭐 별일이야 있겠어.”

구름 속에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태양을 흘낏 바라보았다. 태양의 강렬함이 오늘따라 유독 든든해 보인다. 나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킨 후, 조심스럽게 낯선 길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아얏, 괜찮니?”

“어머, 죄송합니다. 유 예리! 엄마가 뛰지 말라고 했잖아. 어서 '죄송합니다' 해야지.”

“쬐쫑함미다.”

“아니에요. 앞을 제대로 못 본 제 잘못이 커요.”

고개 숙여 사과하는 아이와 아이 엄마를 향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조금 전, 몇 미터 간격으로 들어선 모텔의 위용에 한껏 기가 눌려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걷는 바람에 뛰어오던 아이를 보지 못했다.

“귀여워라. 몇 살이야?”

“네 살이요.”

발그스레하게 물든 포동포동한 두 볼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아이의 모습에 굳어진 입가가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저, 그럼.”

아이 엄마가 살짝 미소를 건네고는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이 엄마는 부담스럽게 늘어진 모델의 어두운 커튼을 친구 삼아 아이와 함께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음침하고 낯설었던 골목길이 왠지 모르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친근하다고? 나 여기 처음 왔는데.”

나는 알 수 없는 이질감에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가까운 곳에서 왁자지껄 시끄러운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다가 떡볶이 사 먹을까?”

“좋아. 네가 살 거야?”

“늘은 내가 쏜다. 맞다! 오늘 엑소 컴백한다고 했는데.”

“뭐? 어디서?”

학생들의 대화가 귓가를 간질이며 늦가을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모델이 늘어선 골목길을 마치 제집 앞마당인 냥 아무렇지 않게 다니는 학생들이 마치 우리 동네를 편안하게 돌아다니는 내 모습 같아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이 골목길이 내가 사는 동네보다 안전하다고 느끼겠지?

골목길에 내려앉은 햇볕이 참 따사해 보인다.


골목길을 벗어나서 도로에 다다르자, 철물 상가들이 쫙 늘어선 거리가 나타났다. 보도의 반이 작은 철물 가게에서 내놓은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다. 낯선 거리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새로운 풍경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았다. 낯익은 물건들부터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까지, 나는 시장 구경을 온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물건들 하나하나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런 것도 있어요?”

“여긴 없는 게 없지요. 만물상입니다. 만물상.”

“그러네요.”

사람 좋아 보이는 주인아저씨가 넉살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이것저것 말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하나씩은 안 팔아요. 하나씩 팔면 손해거든요. 하지만, 아가씨는 내가 특별히 팔아주고.”

아마 아저씨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을 던질 것이다. 하지만, 기분이 좋다.

“그런데 저, 얼마 전에 이거랑 똑같은 거 샀어요.”

“여기보다 비싸게 샀죠?"

아저씨의 단호한 질문에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여기보다 싼 데는 없어요. 다음에 필요하면, 또 와요. 싸게 해 줄 테니.”

“네. 다음에 다시 올게요.”

우리 동네 철물점 아저씨를 볼 때의 친근함이 오늘 처음 보는 낯선 아저씨에게서 느껴졌다.


입가에서 흥얼흥얼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제는 처음 이 길에 발을 디뎠을 때 가졌던 두려움이 기억나지 않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내게는 새로운 길이 저들에게는 익숙한 길이라는 생각에 빙그레 웃음마저 새어 나왔다.

‘나는 왜 내가 모르는 길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철물점 거리의 끝자락에 고미술상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상가 앞에는 각양각색의 불상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 일반 성인의 두 배는 될 법한 거대한 불상 하나가 한 손을 들어서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부처의 입가에 깃든 따스한 말들이 미소와 함께 내게로 다가온다

‘네가 가는 길을 두려워하지 마. 그 길은 이미 많은 이들이 다녀왔고, 다니고 있는 길이니까.’


나는 새로운 길에서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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