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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다서영 Sep 17. 2023

어느 계약직 직원의 의뢰

짧은 이야기(소설)

은희는 어느 기관의 소속 센터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다. 워낙에 꼼꼼하고,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라, 계약직은 맡기 힘들다는 주요 업무 하나를 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은희는 본인이 하고 있는 업무만큼은 전문가라고 자부했다.


계약직이라서 가끔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은희는 열심히 일한 만큼 인정받을 수 있는 센터 근무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센터장이 바뀌면서 은희의 직장생활이 꼬이기 시작했다.


"매년 하던 사업으로 올해도 달라지는 점이 없습니다."

은희의 보고에 센터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추진하라고 말을 한다. 은희가 보고를 마무리하자, 센터장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

"본부 어디서 근무했어요?"

은희 역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저는 센터에 소속된 계약직 직원입니다."

순간 센터장 표정이 돌변하는 것이 은희의 시선에 들어왔다. 은희는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지금 이 업무만 삼 년 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소가 사라진 센터장은 그저 나가라고 손짓했다.

밖으로 나온 은희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직이라고 은근히 무시하는 사람들은 종종 있었지만,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특히, 고위 간부일수록 더욱더 조심했다. 어찌 되었든 계약직들은 공무원이 아니었고, 솔직히 무슨 일이 생기면 잃을게 많은 사람들은 은희보다는 간부들이었다.

"그래. 대놓고 무시하지는 못할 거야."

은희는 이번 센터장도 결코 티를 내지는 않을 거라고 믿으며, 서둘러 사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은희는 자신의 판단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센터장이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낸 것이다. 은희의 보고뿐 아니라, 심지어 말투, 사소한 행동까지 태클을 걸기 시작했다. 은희는 센터장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나중에는 과장한테 대신 보고를 부탁했지만, 과장은 은희만큼 설명할 자신이 없다면서 단칼에 거절했다. 결국, 은희는 보고 때라도 같이 들어갈 공무원 하나 붙여달라고 요청했고, 과장은 본부 경력까지 합해도 채 1년이 되지 않은 신입 공무원 하나를 은희에게 붙여줬다.


하지만, 은희의 고통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윤 주무관, 본사 기획부서에 있었다고요? 그럼 강 국장 알겠네요?"

은희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센터장의 상냥한 말투에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센터장은 은희가 무슨 말을 해도 윤 주무관만을 바라보았다. 은희는 투명인간이 된 기분을 느꼈다. 결국, 은희는 보고서를 센터장의 눈앞에 들이밀고 흔들었다. 무슨 깡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은희도 한계가 온 것이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종이를 본 센터장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보고서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한번 쓱 훑고는, 윤 주무관한테 "주무관님이 한번 정리를 해주세요. 모르는 사람은 잘 가르쳐야 하지 않겠어요?"라며, 은희를 깎아내리는 발언을 서슴없이 던졌다.

대놓고 계약직 따위라고 말을 하지, 그러면 모든 걸 걸고 갑질 신고라도 했을 텐데. 은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감싸 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악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윤 주무관이 연가인날, 급하게 센터장 서명을 받을 일이 생긴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혼자 들어갔는데, 센터장이 은희가 내민 보고서를 냅다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따위 업무나 보고 있을 때인 줄 아세요? 하찮은 사업 따위 누가 관심이나 갖는답니까?" 라며, 소리를 질렀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업무에 대한 비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은희는 결국 한 마디를 던졌다.


"본부에서도 관심 가지고 있는 사업입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전임 센터장'께서 계속 추진하고 있었던 사업입니다."

은희의 말에 센터장이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은희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국민 편의요? 누가요? 그쪽이요? 지나가던 개가 웃겠네요."

뭐? 은희는 놀라서 벌어진 입을 차마 다물지 못했다. 개가 뭐? 말문이 막혀버렸다. 센터장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은희를 향해 온갖 비난과 짜증을 퍼부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본부에서 전임 센터장하고 언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씩씩거리며 화를 삭이는 중이었는데,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계약직 직원 입에서 전임 센터장이란 소리가 나오자, 모든 분노를 은희에게 쏟아부은 것이다.


은희는 영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센터장을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엄마, 잘 지내?"

"은희야? 웬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잘 지내나 궁금해서."

"잘 지낼게 뭐 있어. 성철이 놈 또 회사 그만뒀단다. 아주 집에서 게임만 하는데 스트레서 받아 죽겠어."

"또? 아니 왜?"

"내가 어찌 알아. 어디 창피해서 말도 못 하고. 아, 맞다. 은희야, 영숙이 아줌마 알지? 아줌마가 좋은 사람 있다고 소개해준다는데 주말에 한 번 내려올래? 네가 정부 기관에서 근무한다고 하니까, 그쪽 부모님이 볼 때마다 해달라고 노래를 부르나 봐. 오호호. 내가 너는 서울에서 똑똑한 사람들하고만 일해서 웬만큼 똑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아주, 선을 그어났다. 아주 성철이 때문에 속상한 마음, 네 덕에 다 풀었다. 오호호"

은희는 엄마와의 통화를 끝내고 팔뚝으로 눈을 가린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는데, 그만둬야 하는데. 내년이면 삼십 대 중반이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곳만큼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월세는 어떡하지? 퇴직금으로 몇 개월은 버틸 수 있을 텐데, 그다음은?

엄마와의 통화 후, 은희는 고향에 내려간다는 생각은 접었다.

'하지만, 센터장은? 센터장이 바뀌려면 최소 2년은 있어야 할 텐데, 그동안 버틸 수 있을까?'




은희는 출근하자마자,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커피를 내렸다. 최근에 입맛이 똑 떨어져서 제대로 식사를 못하고 있었다. 커피라도 마시지 않으면 하루 종일 버티질 못했다.


커피를 내리는데, 직원 중 한 명이 다가오더니 말을 건다.

"오늘 장관님 온다면서요? 지금 센터장 난리 났더라고요. 입구부터 청소하라고 아주 난리도 아니에요."

"그래요?"

은희는 모든 것에 심드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장관이 오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다음 주에 센터장을 봐야 할 일이 하나 생겨버렸다는 사실이 은희에게는 더 큰일이었다. 그전에 그만둘까? 하지만, 그만두면? 월세는? 엄마는? 은희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책상에 엎드렸다.


잠시 후, 가까운 곳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관이 온 것 같았다. 은희는 장관 맞이(?)로 정신없는 틈을 타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박 은희? 은희야?"


은희는 잠결에 들리는 본인 이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앞에는 인자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은희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여기서 일하고 있구나?"

중년 남자의 질문에 은희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대답을 했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주위에서 '헉, 헉'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은희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 양복을 쫙 빼입고 선 사람들, 그 중간에 서 있는 중년의 남성, 그리고 그 남성 옆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센터장까지. 은희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은희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인자한 미소의 중년 남성이 또다시 질문을 했다.

"아버지는 잘 계시고?"

"그럼요."

"그나저나 왜 이렇게 연락을 안 해."

"할아버지도 안 계신데, 제가 먼저 연락하기 그렇잖아요."

은희는 연극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대답을 막지는 않았다.

"어허, 할아버지 돌아가셨다고 칼 같이 인연 끊는 거 보소. 섭섭하네. 그나저나 여기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고? 힘든 일은 없고? 계약직이라고 무시하거나 그런 사람들은 없지? 요즘 세상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여기 다 배운 사람들인데, 안 그러냐?"

은희는 센터장을 흘낏 쳐다보았다. 센터장의 입술은 파랗다 못해 점점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럼요. 다들 배운 사람들인데요."

"그래.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자, 갑시다."

"네. 장관님."

중년 남성이 떠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뒤를 따랐다. 잠시만?! 장관님? 은희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하지만, 은희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할아버지 지인, 할아버지 지인"을 무한반복해서 외쳐야만 했다.


그 이후, 은희는 장관의 지인이라는 사실 하나에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 것을 보고 허탈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센터장이 고양이 앞의 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은희는 쩔쩔매는 센터장을 보면서, 문득 장관 입장에서는 센터장이 계약직 직원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희는 이제 센터장에 대해 나쁜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저 자신과 똑같은, 누군가에는 무시당하는 한 사람으로만 보였다.


은희는 장관의 지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센터 내에서 장관 대우를 받게 되었지만, '신기하게도' 갑자기 얻게 된 권력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은희는 휴대폰에서 최근에 받은 문자 하나를 확인했다.

"명함의 글씨가 사라지면, 당신의 의뢰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잊지 마세요.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당신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요."

"이 말 때문에 그런가."

지금 주어진 권력을 복수하는데 쓰면, 또다시 그 지옥 같은 상황으로 떨어지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갑자기 "자, 지금까지 꿈이었습니다."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상상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몇 주 전 새벽녘, 은희는 센터장 때문에 도저히 잠이 잘 수가 없어서 무작장 거리로 나섰다. 걸으면 좀 괜찮아질까 싶었던 것이다. 한참을 목적 없이 헤매고 있는데, 길거리 한가운데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명함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명함]

완벽하게 당신이 원하는 상황으로 만들어드립니다.

당신의 "수호자"에게 의뢰하세요.

비용은 무료입니다. 문자 의뢰도 가능합니다.

"000-000-0000"


평상시였으면 당연히 무시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은희는 홀린 듯이 명함을 집어 들었고, 곧바로 문자로 의뢰를 했다.

"제발 센터장이 내 앞에서 쩔쩔맬 수 있도록 해주세요!"


장관을 만난 이후, 명함 속 글자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잘 끝냈어?"

표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여자의 질문에, 수많은 기기에 둘러 쌓여 있던 한 남자가 장난스러움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잘 끝났지. 같은 남자에 영혼도 이질감이 없잖아."

"다행이야. 동의를 쉽게 받아내서."

"권력욕도 있었고, 그걸 이용하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동의는 어렵지 않았어."

"장관이라는 사람은 의뢰자의 이름이 나오면 어떻게 반응하도록 했어?"

"'의뢰자의 할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로 대답하게끔 세팅해 놨어. 당연히 장관이라는 사람의 무의식한테도 동의받아놨고. 아마, 장관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거야."

"잘했어."

"다음에도 이런 쉬운 의뢰였으면 좋겠다. 가해자의 몸으로 들어가는 의뢰는 정말 고역이야. 제약이 너무 많아. 하나하나 예민하게 신경 쓰지 않으면, 갇힐 수 있단 말이지. 진짜 스트레스야!"

여자는 몇 개월 전 의뢰를 생각했다. 피해자에게만 본모습을 드러내며 괴롭히던 가해자의 이중성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게 해 달라는 의뢰였다. 가해자의 몸에 들어가야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엄청나게 애를 먹었다. 결국, 가해자의 무의식도 가해자의 발전을 위해서 남자의 영혼을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했는데, 중간중간 가해자의 의식이 발광을 해서 남자의 영혼이 크게 다칠 뻔했었다.

"우리는 들어오는 의뢰를 거부할 수 없어. 의뢰자가 어떤 사람들인지는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네, 네, 그럼요. 내가 죄가 많아서 갚고 있는 중이라는 거, 반복해서 말 안 해도 아주 잘 알고 있답니다."

남자는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대답했다.

"결국은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이야."

여자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뀐다.

"그래. 그리고 너는 어쩔 수 없이 나 때문에 잡혀 있는 거고."

남자는 씁쓸한 표정으로 여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여자는 남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 있는 건, 너 때문이 아니야. 나 역시 나의 죗값이 있으니까. 그러니 그런 씁쓸한 표정은 짓지 마."



(장편으로 쓰려다가 그냥 초단편 소설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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