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박소현 님이 건망증이 심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나는 내용을 보고 그만 식겁하고 말았다.
"앗. 나도 저랬는데!"
사건 1
직장에서 업무 관련해서 회의가 있었다. 타 기관의 직원들도 참석하는 회의였기에 팀 전원이 지원을 나갔다. 나는 타 기관 직원들을 회의실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타 기관 직원이라고 해도 업무 때문에 통화를 여러 번 했던 분들이라서 나름 내적 친밀감을 가지고 즐겁게 안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꽤 오랫동안 전화로만 업무를 주고받았던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며, "△△에서 근무하는 □□님이시라고요? 반갑습니다. 저, 아시죠? 00입니다. 전화로만 만나던 분을 드디어 만나 뵙게 되네요."라며 반가운 마음을 표했다. 진심으로 반가웠다. 그런데 내 인사를 들은 그분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갔다. 나는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입가를 털어내는데, 그분이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저, 오늘 세 번째 뵙는 건데요." 세 번째? 세 번째라고? 당황스러웠다. 기억에 전혀 없는데, 처음 보는 얼굴인데. "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분이 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제 인상이 기억에 남는 인상이 아니긴 하죠. 저저번 회의 때도 뵙고, 또 한 번은 지나가다 우연히 뵙고 인사했었죠." 그리고 그분은 마지막으로 내 심장에 쐐기를 박는 말을 던지고 조용히 사라지셨다.
"그때도 전화로만 만나던 분을 드디어 뵙게 되었다고 반가워하셨지요."
진심 치매검사라도 받으러 가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안면인식 장애라도 있는 건가? 당시에 나는 진지하게 병원에 가야 하는 건지 고민했었다. 물론, 지금은 3D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분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건 2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늦은 저녁, 갑자기 남사친(남자사람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연락을 거의 안 하던 사이였기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 얼른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
"응. 웬일이야. 네가 전화를 다 하고."
"아니, 대학 동기들하고 술 한잔 하다가 네 이야기가 나와서 전화해 봤어."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대학 동기들이면, 내가 모르는 사람들인데?
"아니, 네 친구들하고 내 이야기할게 뭐가 있어? 다 모르는 사람들인데."
"기다려 봐. 00이 바꿔줄게."
"누구? 누구를 바꿔준다고?"
당황해서 버벅거리는 사이 친구는 누군가를 바꿔줬다.
"안녕하세요. 000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 안녕하세, 오랜만이요? 우리가 어디서 봤었나요?"
혹시 친구랑 같이 있을 때 만난 적이 있었나? 나는 열심히 기억을 뒤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제 이름을 잊으셨나 보네요. 저 소개팅했었던 000입니다."
소개팅? 진심으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장난치는 줄 알았다.
"아~~ 저랑 소개팅을 했었다고요. 그렇구나."
"함께 레미제라블 영화 봤었죠."
앗! 레미제라블? 기억이 났다! 그런데 영화를 본 기억만 떠올랐다. 내 친구랑 본 거 아니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에이. 설마 내가 소개팅까지 한 남자를 기억하지 못하겠어?' 나는 술 김에 내 친구랑 그 친구가 짜고 장난을 친다고 확신했다.
"장난 그만하세요. 내가 레미제라블 영화본 건 어찌 알아서는, □□이 바꿔주세요."
내 말에 상대방은 당황한 것 같았다. 웅성웅성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친구가 빵 터진 목소리로 "너 뭐 하냐."라며 물었다.
"너야말로 뭐야. 무슨 장난이야."
진지한 내 목소리에 친구는 "너 진짜 기억 안 나? 00이랑 소개팅했잖아. 밥 먹고 영화 봤다며."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정신이 멍 해졌다.
"네가 나한테 소개팅을 시켜줬다고?"
그제야 어렴풋한 기억들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맞다, 소개팅을 했었다. 그리고 영화도 봤었다. 그런데 왜?!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거지? 나는 어찌어찌 대화를 끝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기억을 되살렸다.
"와, 미쳐버리겠네."
진심으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영화를 봤고, 그 옆에 누군가 있었다는 건 기억이 나는데, 소개팅 당사자의 얼굴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와.... 미친 거 아니야?!
나는 내가 ADHD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정말 상상 속에서도 해 본 적이 없다. 말도 행동도 큰 편이 아니고(학교를 다닐 때는 너무 조용해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던 아이였다), 학교 생활도 직장 생활도 문제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때 물건을 정말 많이 두고 다니기는 했었다. 준비물을 잊어버리고 학교에 가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책가방을 두고 간 적도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두고 다니는 일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박소현 님도 어렸을 때 물건을 자주 놓고 다니거나 잃어버렸다는 말을 했다. 소름이 돋았다. 그나마다행인 건(?), 위의 두 사건을 제외하고는 인간관계에 지장을 줄 정도로 기억을 못 한 적이 없었는점?ㅜ (친구는 내가 본인이 소개해준 친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일부러 기억이 안 나는 척 한 줄 알고 섭섭해하더라고요. 한동안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기억이 납니다.나 때문에 상처받은 두 분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일부러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진짜 기억이 안 났어요.ㄒoㄒ)
혹시 저 같은 사람 있으면, 혼자 자책하거나 머리 쥐어뜯지 마세요. 주의력 결핍일 수도 있답니다. (물론, 진단이 필요하겠지만요. 가능성만) 그리고 우리에게는 박소현 님이 계시잖아요.... 우리 힘.. 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