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정말 술이 싫다.
BUT, 아버지는 술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엄마는 술과 담배를 싫어한다. 외할아버지가 담배와 술을 달고 사셨던 분이라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절대 술과 담배를 하는 남자는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는 담배를 안 피우신다. 엄마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하지만,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가끔씩 술에 집착을 보이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술 많이 마시는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했는데. 아이고, 저렇게 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이렇게 마음고생을 하네." 하며 툴툴댔다.
그런데 옆에서 내가 보기에는, 아버지? 확실히 술 없으면 못 사는 분이다. 매 끼마다 (아침 제외) 소주 반 병 이상을 마신다. 내가 어렸을 때는 더 마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반 병으로 줄어들었다. 어릴 적 기억 속에 아버지는 언제나 술에 취한 모습이었다. 술에 취해서 오시면 바로 곯아떨어져서 주무셨는데, 솔직히 나는 그 모습이 싫다거나 괴롭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술 먹고 꼬장을 부리시는 것도 아니고(때때로 부리셨지만) 밤 새 앉혀놓고 잔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린 마음에 혼날 일이 있을 때는 차라리 술 마시고 오셔서 빨리 주무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아버지가 술 마시는 걸 정말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래서 두 분은 술 때문에 정말 많이도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아버지는 엄마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마실 건데 왜 사람 스트레스받게 하느냐며 섭섭해했고, 엄마는 다 당신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왜 이해해주지 못하느냐며 닦달했다.
한 번은 내가 엄마한테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드시는데 그냥 있으면 안 돼?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그나마 내가 뭐라고 하니까 덜 마시는 거라며 잔소리를 멈출 수 없다고 했었다.
아버지는 엄마가 그만 마시라고 아무리 말해도 절대로 마시는 양을 줄이지 않는다. 유독 엄마의 잔소리가 심한 날은 두 잔 마시고 싶은 걸 한 잔으로 줄이기는 한다. 하지만, 엄마가 어디 산책을 간다던지, 장을 보러 가면, 바로 냉장고로 직행. 꼭 할당량을 채운다.
남아 있는 건 엄마의 분노와 눈치 보며 마시는 아버지의 스트레스뿐.
오늘 아침도 엄마의 잔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버지가 아침부터 술이 떨어졌다며 사러 가셨나 보다. (소주를 페트병으로 몇 병씩 사 오신다.) 엄마는 그 모습도 한심했지만, 아버지가 딱 술만 사 온 것에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당신은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야. 어떻게 술만 달랑 사 올 수 있어. 과일 하나라도 하다못해, 과자 하나라도 우리 먹으려고 사 올 수 있는 거 아니야? 아주 그냥 술, 술, 술만 집착을 해서는."
결국은 술에 집작 하는 아버지에 대한 못마땅으로 끝났고, 한동안 두 분 사이에 침묵만이 흘렀다. 엄마는 자리를 피했고, 한 분은 방에서 한 분은 거실에서 한참을 계셨다.
한 삼십 분 동안 집 안은 절간처럼 고요했다. 잠시 후, 엄마가 움직였다. 부엌에서 이것저것 뭔가를 부스럭거리던 엄마가 아버지한테 뭔가를 맛 좀 봐달라고 내놓았다. 아버지는 한 잔 마시더니, 맵다며 콜록거리셨다. 엄마는 천천히 마시지 왜 이렇게 급하게 마시냐며 아버지를 걱정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엄마와 아버지의 침묵은 사십여 분만에 끝이 났다.
며칠에 한 번씩 반복되는 장면이다. 부모님이 술 때문에 말다툼을 하고, 한동안 냉기가 흐르다가 금방 먹을거나, TV를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이어가는 일상.
처음에는 두 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 직장에서 심리 강의를 들었는데, 거기서 강사 분이 이런 말을 했다.
- 애정은 휘발성이다. 금방 사라진다. 그 이후는 애착이다. 아무리 밉고 싫어도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전전긍긍 걱정하며 불안해하는 마음 -
엄마와 아버지는 서로의 건강을 본인의 건강보다 더 많이 신경 쓴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끙끙되면 아버지는 바로 약국으로 향하고,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콜록거리면 엄마는 바로 생강차를 타 오신다.
만약, 두 분이 부부로서 심리적 관계가 끝났다면, 술로 인한 다툼은 아마도 없지 않았을까?
솔직히 지금 두 분에게 술 때문에 제발 그만 좀 다투시라고 말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아마도 두 분은 같이 사는 내내 술을 마시고, 잔소리를 하고, 냉기가 흐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반복되는 일상을 계속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대화가 없는 부모님보다 투닥투닥하는 부모님이 더 좋다.
가끔은 두 분의 토닥임이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설마 본인들도 모르는 두 분만의 소꿉놀이는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그냥 두 분이 예쁘다.
PS. 오늘 저녁상에서 엄마가 아버지 안주 하라며 월남쌈 하나를 내민다. 술을 그렇게 싫어하시는 분이 안주하라며 월남쌈을 싸주다니. 역시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