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느낀 낯선 감정
한평생을 도시에서 살던 내가 한국에서 13시간이나 떨어진 캐나다에 있는 시골에서 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영주권을 가질 수 있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전적으로 나를 도와주겠다는, 처음 보는 사람의 말만 믿고 이곳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만 해도 이러한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다.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되지만 그만큼 영주권이 절실했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온갖 이민자가 가득한 토론토를 벗어나서 캐나다 원주민들이 사는 마을에서 살아본다는 경험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느껴졌을지 누가 알 수 있을까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사람의 욕심은 이렇게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는 건 알지 못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은 이 근방에서 제일 작은 마을이며 마지막 행정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도시이다.
이곳을 지나가면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보던 이누이트나 다른 원주민들이 사는 마을을 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먼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지막 행정 시설이 있는 마을답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여러 시설들도 존재한다.
마트도 3개나 있고, 음식점도 여러 개가 있으며, 하나뿐이지만 카페도 존재한다.
그 이상의 것을 원한다면 차를 소유하고 있으면 된다.
차가 있으면 옆 마을에 있는 헬스장에 갈 수 있고, 2시간이나 떨어져 있지만 영화관에 갈 수도 있으며, 6시간을 가면 공항에도 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차가 없고 그렇게 이 마을에 갇혀버렸다.
먹고 자는 것 외에는 할 게 없는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일뿐이다.
그래서 주말 밤낮없이 일을 했다.
처음에는 내가 어떤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곳에 와서 이런 고생을 하는지 후회했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적응하기가 무섭게 이러한 생활에 익숙해졌다.
문제는 일을 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일을 할 때는 해야 될 것이 많아서 다른 생각을 할 새가 없지만, 쉬는 날이나 혼자 있을 때 몰려오는 고독감이 나를 무겁게 짓누른다.
캐나다에 와서 항상 외로움을 느꼈지만 이 마을에 와서 느끼는 외로움은 그 정도가 더 심하게 느껴진다.
마치 몇 톤짜리의 돌이 내 몸 위에 쌓여가는 기분이다.
일을 할 때는 잠시나마 말을 할 수 있어서 덜하지만, 혼자 시간을 보낼 때, 문득문득 하루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내 모습을 볼 때면 미칠듯한 고립감에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있는 호수에 가서 사람 구경을 하며 고립감을 이겨내보려고 하지만 친구도 가족도 없는 이 쓸쓸한 현실을 이겨내기는 역부족이다.
해외생활이 외로움과의 싸움의 연속이라지만, 세상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단절된 곳에서의 외로움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외로움을 초월해 낸다.
항상 나이트 시프트로 근무를 하다가 처음으로 모닝 시프트로 일을 한 적이 있다.
전 날 밤에 일하고 바로 그 다음날 아침에 일을 해서 일이 끝난 후에 바로 낮잠을 잤었다.
밥 먹는 것도 건너뛰고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니 밤 10시가 되어있었다.
다시 잠들기에는 이미 잠이 깼고, 어디를 가거나 누구를 만날 수도 없는 시간대에 문득 이곳에 와서 노을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밤 10시에 노을을 본다는 게 말이 안 되겠지만, 고위도 가까이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백야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여 밤 10시가 넘어서야 해가 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밖으로 나섰고 이 날의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하게 되었다.
밖에 나가보니 세상이 타오르듯이 해가 지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몇 분을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하늘의 모습이 나를 반겼다.
그래서 그 길로 곧장 걸어서 호숫가로 갔고, 그렇게 아무도 없는 호숫가 근처에 앉아서 하늘을 구경했다.
보이는 것은 호수와 하늘뿐이고, 들리는 것은 물소리뿐이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요함 속에서 그렇게 큰 하늘을 바라본다는 게 참 경이로웠다.
그리고 '세상이 아름다워서 그만 살아도 괜찮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전까지만 해도 외롭다는 걸 실감하고 있지 못했고,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이 순간을 계기로 내가 이곳에 와서 정말 외로웠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모든 친구들이 그립고 가족이 그립고 사람이 그리웠다.
시골에 오면, 미드에서 보던 생활을 할 줄 알았다.
원주민과 백인이 가득한 이 마을에서 유일한 동양인으로 살아가면 책이나 영화에서만 보던 특별한 생활을 할 줄 알았다.
내가 마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하루하루 즐겁고 재밌는 일만 가득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을 아니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선을 긋고 나를 철저하게 이방인 취급한다.
소속감을 가지면 달라질까 싶어서 여기저기 다녀봤지만 말로만 'Welcome'이라며 나를 반기고 자신들의 경계에 들어오는 건 허락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곳에 온 목적이 장기 거주 목적이 아닌데 누가 나를 반길까 싶기도 하다.
반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나라도 잠깐 머물다 갈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친절을 베풀고 싶어 하진 않을 것 같다.
베풀어도 어느 정도, 그 이상을 베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외로움을 깨닫자마자 이곳을 떠날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에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지금 당장 살아남는 게 급급했기에 이 기회가 너무나도 반갑게만 느껴진다.
지금보다 더 큰 곳으로 가게 되었으니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가득하고 그곳에서는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