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한국에 온 지 벌써 4년이 되었다. 논문을 제출하고 독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던 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코로나로 막힌 국가 간 이동도 조금씩 열리고, 조금 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 같다.
그때가 2018년이었으니까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을 준비하는 전시, 연구, 심포지엄 등이 매우 활발한 시기였다. 나도 관련 세미나와 발표에도 참여하며 남겼던 자료들이 많다. 한국에 들어오니 이듬해 금호미술관, DDP,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등에서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크고 작은 행사들이 열리고 있었다.
◆ 바우하우스 설립 ◆
1919년 독일 바이마르(Weimar)에 설립된 바우하우스[그림 1]는 예술과 산업의 경계에서 다양한 실험을 펼쳤던 예술 조형학교로 1933년 나치에 의해 폐쇄되기 전까지 많은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며 오늘날 디자인, 건축, 예술 부분에 있어 중요한 근간을 이루었다. 이러한 영향력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이념이나 활동은 뚜렷하고도 강렬할 것이라 생각된다. 설립 당시 작성된 바우하우스 선언문 내용이나 어투만 보아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삶을 타계하기 위한 그들의 도전과 행보가 뚜렷하게 일관되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중 오늘 주목해 보고자 하는 부분은 예술과 수공예의 다양한 분야를 긴밀하게 아우르는 연합체를 구성하여 목표를 이루고자 했던 바우하우스의 태도이다.
* 바우하우스가 남긴 크고 작은 많은 업적들이 있으나, 이를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형태 구현에 있어 기능성과 효율성에 충실한 객관적 토대를 마련하려 했다는 점이다. 또한 교육의 중요성 강조하며 수작업을 기반으로 여러 분과를 포섭한 새로운 교육 방식을 창안해 냈으며, 마지막으로는 양성의 절대적 평등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이다. 물론 바우하우스의 운영 기간 내내 일관되게 실행되지 않았고, 각자 의견이나 관점 차이도 있었으며,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세간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 창립자 발터 그로피우스 ◆
우리는 일반적으로 전문가는 한 분야에 집중하여 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기술, 남다른 식견과 안목 등을 갖춘 사람이라 생각하고, 대부분 전문가들은 집단을 이루어 그 효율성과 영향력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하지만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그림 2]는 바우하우스 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며 조금 다른 전략을 취했다:
“미래의 새로운 건축을 위해 조각, 회화와 같은 순수미술과 공예와 같은 응용미술이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 화가와 조각가여, 건축에 대한 울타리를 제거하고 공동의 건설자가 되자.”
“공예가와 미술가 사이에 가로놓인 높다란 장벽을 만드는 계급 차별을 없애고 새로운 공예가 집단을 만들자.”
“… 옛 예술학교는 이와 같은 통일을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는 다시 한번 공방과 합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 바우하우스의 교육이념 ◆
건축가였던 그로피우스의 최종 목표는 완전한 건축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스위스의 화가 요한네스 이튼(Johannes Itten, 1888-1967),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 러시아 구성주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미국 판화가이자 만화가 라이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 1871-1956), 독일 텍스타일 마이스터 군타 슈톨츨(Gunta Stözl, 1897-1983), 독일 무용수이자 무대미술가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 1888-1943) 등 타 분야의 우수한 인재를 포섭하며, 바우하우스를 교육기관이자 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했다. 장인(오늘날 ‘선생’의 개념)으로 칭해졌던 각 전문가들은 도제(오늘날 ‘학생’의 개념)에게 기본적인 조형 원리와 각 기술을 습득하도록 하였고, 도제는 장인과 함께 작업을 하며 스스로 배우게끔 하여 추후 활동의 확장 가능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는 점도 눈 여겨 볼만하다. 그런 이유로 학교 내에서 선생, 제자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그들 간의 관계가 평등해야 함을 강조했다고 한다. 선언문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그로피우스가 주장했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예술은 건축, 조각, 회화, 공예, 공연 등의 기존 예술 분야를 통합한 총체적 예술이었다. 당시 불안정하였던 정치상황과 변화하는 사회에서 이전의 학문으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가 시도했던 다양한 형태의 협력은 초반에는 순수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미술 분야’와 생활과 좀 더 밀접하고 실용적인 부분이 강조되었던 ‘공예 분야’ 간의 협업으로 시작하여, 후반에는 대량생산의 효율성에 기반한 ‘예술’과 ‘과학기술’ 분야의 협업으로 발전되었다. 바이마르에서 시작된 바우하우스는 1925년 데사우(Dessau)[그림 3]로 이전하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통합적 사고와 문제 해결이 가능한 인간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 그들은 외부에서 전시를 하고, 산업체로부터 주문을 받아 생산활동을 하는 등 학교 밖에서도 적극적으로 실험 활동을 하며,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예술 분야도 재정적으로 자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었다.
◆ 바우하우스, 그 이후 ◆
바이마르에서 시작된 바우하우스는 1933년 나치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14년이라는 짧은 역사이기는 하지만 이후 출신자들이 전 세계 각지로 퍼져 그 활동을 영위함으로써 지속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이 사회적·정치적 상황으로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고 있다는 일견의 의견도 있지만, 예술과 기술의 조화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꿈꾸었던 그 신념만큼은 오늘날 학제 간의 교류와 협력을 기반으로 한 기술과 지식의 혁신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융·복합, 교류, 협력 등을 장려하는 정책들도 많이 등장했고, 많은 부분에서의 변화가 있어왔다고 본다. 영역 간 경계에서 발화되는 우리의 실험과 도전이 100년 후의 역사를 쓸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