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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R POST Jan 28. 2016

소수의견

소수의 의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최대 다수가 행복하면 최대 행복이 추구될까? 사실, 재계발 사업은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한 사업이 아니다. 역으로 소수(?)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자본의 흐름이다. 그래서 소수의견이 가지는 "소수"에 대한 내적 의미는  아이러니컬하다고 할 수 있다. 


소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또 다른 "소수"가 짚 밟히는 모습이 우리의 현실이다. 여기서 짚 밟히는 인물들은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입자들이다. 삶의 꿈을 위해 몰려든 서울의 군상들이 자본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그림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소수의 의견을 반하여 표현되는 말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도 있다.



소수 의견, 그 굴레에 갇힌 피해자들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 중, 누가 피의자일까? 국가일까? 경찰일까? 아니면 피고인일까...? 영화의 재미는 존재하지 않는 악인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다. 직접적인 피의자도 피해자도 잔인한 구조의 사슬에 엮여 허우적 되고 있을 뿐이다.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달려드는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찾고자 하는 정의를 위한 피고인에 대한 옹호가 점점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직감한다. 피고라고 느낀 피해자의 정체와 행동이 점점 드러나며 자신이 찾고자 하는 정의의 모호성이 그들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소수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소수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소수는 약자가 아니다. 소수의견은 보편적 의견으로 발전해야 한다. 소수의 의견이 보편적 의견으로  확장될 때 소수 의견은 정의에 한층 다가설 수 있다. 소수의 패러다임을 다수의 이익에 대비하거나 극 소수층의 대항적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것이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소수의 패러다임을 넘어 소수의견이  보편화되는 인권의 보편성을 만들어 가는 구조가 우리에게 어쩌면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 답에 대한 의문의 시작은 영화를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Understand different 

H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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