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거리두기
엄마와 딸
남자이기에 잘 모르는 관계. 엄마와 딸. 하지만 결혼을 하고 딸을 낳고 아내를 보면서 '엄마와 딸' 관계가 새롭게 보인다. 엄마와 딸? 양육의 관계에서 독립된 관계로 가는 과정 같다. 그 과정의 끝에서 오는 엄마의 상실감과 외로움... 어쩌면 왜곡된 사랑이 딸을 힘들게 한다.
자신의 분신을 낳고 떠나보내는 어미의 미련일까? 엄마는 '염려'라는 포장된 사랑으로 딸을 자신의 박스에 갇아 놓으려고 한다. 딸은 이미 박스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성장했는데 엄마의 마음은 딸처럼 성장하지 못했다. 엄마는 딸이 떠나는 것이 싫다.
전화 한통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 "엄마야"... 달갑지 않은 목소리, 또 어떤 잔소리를 하실지 딸들은 방어기제를 활짝 편다. 말을 거칠어지고 가시 돋는 말이 쉽게 나온다. 귀찮다. 간섭하는 엄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듣기 싫다.
하지만 곧바로... 미안해진다. 엄마의 잔소리에 너무 격하게 반응하지 않았는지 후회스럽다. 내 모습이 싫다. 보잘것없는 내 모습에 우울해진다. '내가 문제이다.' 지친다. 그래서 엄마와의 통화는 결국 나의 문제로 귀결된다.
죄책감
왜? 죄책감을 느끼는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결혼을 안 해서? 아이를 낳지 않아서? 좋은 직장을 다니지 않아서? 엄마에게 미안한가? 왜 죄책감을 느끼는가?
갈등의 근원이나, 갈등의 대상 자체가 모호하다. 전화를 끊고 느끼는 이 죄책감은 모호한 원인으로 가득하다.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원인?
부모와 어떻게 연을 끊고 살겠는가? 그리고 부모가 무슨 큰 잘못을 했는가? 엄마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진정으로 딸이 느껴야 할 진짜 죄책감은 "심리적 거리"를 두지 못한 자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늙어 가는 엄마의 왜곡된 사랑에 대해 심리적 거리를 두지 못하는 것.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엄마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죄책감의 원인을 찾는 과정이자 엄마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아이가 자신이 왜 혼이 났는지를 부모로부터 충분히 설명을 듣지 못할 때, 그 원인을 결국 자기 잘못으로 돌린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이 잘못해서 부모가 자신을 혼냈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그 행동은 익숙해진다. 이는 편하기 때문이다. 이 합리화 공식만큼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없다. 자기를 비하하고 술 먹고 쓰러지는 것만큼 세상 편한 행동이 어디 있겠는가... ? 정신 줄 놓으면 그만이니... 감정 소비가 없다. 나를 공격하면 그만이다.
나는 착한 딸을 그만 두기로 했다.
누군가 자신을 착하다고 하는 것. 그것은 평판이다. 내가 착해 지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은 이미 착한 것이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 그러다 듣는 말. "제는 참 착해"... 그 언어에 신경 쓰지 말자. 내가 누군가에게 착하려고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저 상대방을 존중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모호한 말 "착하다."라는 전적으로 상대방이 반응하는 나의 서비스의 결과가 아닌가? 그저 상대방을 존중만 하면 되지! 내가 그 사람에게 뭔가를 제공하고 꼭 "착해(?) 야만 하는가?" 그리고 꼭 그 반응에 존재감을 느껴야 하는가?
심리적 거리 두기
심리적 거리를 두자. 그 거리에서 상대방의 변화와 나의 미래를 생각하자. 좀 더 객관적인 자신을 만나게 된다. 좀 더 객관적으로 엄마를 보게 된다. 짜증은 연민으로 바뀔 것이고, 가시 돋은 말은 이해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엄마와 딸은 그전보다 더 행복하게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짜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나는 착한 딸을 그만 두기로 했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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