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보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슨 말인가? 없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자연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에는 사실 인간이 개발한 것은 없다. 상하수도도 전기도 가스도 어느 것 하나 없다. 인간이 살기 위해 필요한 공급원이 없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존재한다.
텐트는 그런 면에서 가장 최소한의 자연 속의 인간의 집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어떠한 인프라도 구축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자연에 유일하게 인간을 보호하는 인위적인 공간이다. 텐트를 치고 잠을 청한다. 잠시나마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을 떠나 자연의 품에서 있는 그대로 잠이 든다.
사실 춥다. 그리고 배도 고프다. 재미가 없지 않다. 힘들다고 해서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대자연을 홀로 맞서 오랫동안 마주설수는 없다. 그러기에 인간은 너무 약하다. 그래서 잠시나마 대자연에 비집고 들어가 텐트를 친다. 대자연은 나의 침범에 아량을 베푼다. 작은 텐트를 자신이 크다고 무시하지 않는다.
일상의 사람들은 대자연 같지는 않다. 사람들은 조금만 더 뫼만 높으면 타인을 무시한다. 경쟁구조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한국인의 경우 그러한 경향이 더 심하다. 좀 더 높은 직급, 좀 더 높은 연봉, 남들이 알아주는 직장에 근무하면 자신에게 서비스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화를 내고 그 사람들을 무시한다. 단순히 애로사항에 대한 문의가 아니라, '너는 나에게 복종해야 돼!'라는 강압적인 기운이 언어에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자연은 다르다. 인간은 대자연에 비하면 매우 하찮은 존재이다. 지진이 일어나면 모든 것은 무너지고, 해일이 덮으면 인간이 만든 위대한 도시는 순식간에 삼켜져 버린다. 그래도 인간은 대자연의 앞에 기고만장하다.
한 개인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할까? 1등을 했다고 돈을 많이 번다고 대단할까? 어느 누구도 그들이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도 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많은 글들과 비디오로 가진 자를 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와 관계가 있거나 내가 속한 집단의 상급자의 경우는 그 태도는 달라진다. 익명의 관계와 실질적인 관계에서는 반응의 태도도 다르다. 왜냐하면 내가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반대로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가면 직위상으로 낮은 사람들을 관리한다는 입장으로 쉽게 무시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정복적인 인간의 본능이 꿈틀 거린다고 할까... 인간의 태생적인 본능 같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반응은 쉽고 편하다. 발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내뿜으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계란 별로 중요치 않다.
대자연은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어서 여유롭다. 그리고 누군가 자기의 공간에 침범하여 텐트를 치더라도 그저 편안히 그 자리를 비워준다. 대자연은 웅장하고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지만, 사실 누구보다 부드럽다. 포용력이 크다. 그래서 남을 꺾으려 하기보다는 남을 되도록이면 조화롭게 포용하려고 한다. 물론 그 남이 그러한 대자연의 마음을 모르고 계속 기고만장하면 대자연은 분노한다. 하지만 그 분노도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일 뿐, 의도적이지는 않다.
자연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일상에서 자연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의 나는 조그마한 일에 그 부분을 제거하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지는 않는가... 조그마한 침범도 용납할 수 없고, 조그마한 손해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게 나를 지키고 싶은 것인가... 정말 이러한 마음이 나를 지키는 것일까?
누군가 잠시 내 구역에 텐트를 친다고 해서 내가 변하는 것도 아닌데, 그 작은 침범도 나는 용납하지 못한다. 무엇이 두려워서일까? 크게 보면, 작은 흠집은 누군가를 포용할 수 있는 큰 힘이 될 텐데... 그 흠집마저 용납하지 못하는 나는 부드러운 자연과 같은 사람은 아니다. 아니면 신경이 곧두선 날 선 아이와 같다. 생존 본능에만 갇힌 동물이 모습이다.
자연을 본다. 그리고 느낀다. 그런데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 감상은 거짓이 된다. 그래서 자연을 다시 본다. 그리고 내 마음을 일상에서 그때 느꼈던 자연과 같이 될 수 있도록 리마인드 해본다.
-노르웨이 258 도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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