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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R POST Jun 04. 2016

널 기다리며 -모두의 아픔 너머에

이 시대에 조명받지 못한 질문

https://youtu.be/OH3HQ2Qe4eU

(스포일러 포함, 심신이 약하신 분들에게는 추천하지 못합니다.) 


법의 위치 


법은 어디에 서 있는가?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법은 어떻게 집행되어야 하는가? 인간이 살아가며 없어서는 안 되는 사회적 약속이 법이다. 하지만 가끔은 법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널 기다리며 


15년을 기다렸다. 내 아빠를 죽인 살인자가 출소한 날이다. 그는 누군가의 죗값을 받고 15년 동안 구속되었지만, 우리 아빠의 죗값은 이 사회에서 받지 않았다. 나는 15년 전 법의 판결과 함께 괴물이 되기로 마음먹었고 그를 복수하기 위해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그녀의 복수?


그녀의 복수는 법망을 빠져나간 살인범을 이 사회의 약속인 법으로 처벌하는 것이다. 법의 허점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는 살인범을 그녀는 법의 목줄을 감으려 한다. 영화의 프레임은 새롭다. 그 흔한 복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의 어두운 면에 합리성이란 무엇이고? 법의 지배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피해자 중심에서?


무죄 추청의 원칙에 의해 모든 인간은 확실한 증거와 물증이 없다면 죄인으로 판명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세워서 죄인으로 만든 경우가 많았다. 아니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확실한 증거 없이는 누군가를 판결한다는 것은 무죄 추청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질문한다. 명백한 살인의 경우에도 그것이 적용되는지... 그리고 가슴 아픈 질문을 던진다. 그 살인자에 의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가족들의 삶에 대해서... 



피해자 지원?


한국 사회의 피해자 지원 시스템은 매우 열악하다. 피해자 가족이 받은 트라우마는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그들의 삶이 온전히 설 수 없는 역할을 할 정도이다. 살인자는 벌을 받지만 그 어떤 처벌도 피해자 가족의 근원적인 삶의 의지를 회복시켜주지는 못한다. 


한국 사회는 피해자 가족에게 너무 냉혹하다. 경제 발전에 급급한 한국 사회 풍조는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짊어 나가기는 힘겨운 사회이다. 그들의 아픔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참사일 뿐이다. 참사에 대한 사회의 위로는 너무 냉혹하다. "네가 알아서 하세요."라는 식이다. 참 가슴 아픈 사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스포일러 포함)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 희주는 살인자에게 복수한다. 희주의 복수는 살인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대신 살인자에게 자신의 고통을 보여준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람을 죽인 살인자는 피해자 가족의 아픔을 알지 못한다. 알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세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본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차별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단지 세상을 향한 복수라고 생각한다. 


희주는 그런 살인자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15년 전 당신은 나를 괴물로 만들었어요." 희주는 놀이터 그네에서 살인자가 보는 앞에서 개목줄을 자신의 목에 걸고 그네의 손을 놓는다. "덜컥" 희주는 즉사한다. 살인자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본다. (여기서 배우 김성오의 연기는 압권이다. 살인자의 눈빛이 변한다. 그 희미한 감정의 변화를 카메라는 담는다.) 희주는 말한다. "나의 고통이 보이나요? 이제 당신은 살인자예요."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던 살인마는 희주의 죽음 앞에 희대의 살인마가 되고 만다. 희주의 죽임이 살인마의 명백한 증거가 때문이다. 어쩌면 살인자는 이미 15년 전 희주를 죽였다. 희주는 15년 전 세상의 판결에 이미 자신의 목숨을 잃었다. 살아있지만 살아 있지 못한 송장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죽음은 단지 지난 15년의 억울함을 증명하는 자살일 뿐이었다. 



누구의 책임인가? 


살인을 사회구조적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살인의 행위는 결국 개인이 한 끔찍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가끔 모든 문제를 사회구조적 문제로 돌리는 사람은 비난을 받는다. 자기가 열심히 하면 되지? 왜 끄덕하면 구조적 문제야? 십분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반응에 대해서 희주의 죽음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살인은 누구의 잘못인가? 


희주도 살인자다. 살인마 기범도 살인자다. 모두를 사이코 패스라고 단정 짓고 한쪽으로 치워버리기 전에, 그들을 살인자로 만든 이 사회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한다. 희주의 죽음 앞에 흔들리는 살인자 기범의 눈빛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살인자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놈이다. '단지 살인자가 피해자의 고통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그의 살인은 멈춰지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 볼 뿐이다. 



살인자도 감당하지 못한 피해자의 고통 


묻지 마 살인이 일어난다. 여성 혐오(?)라는 네임텍이 붙은 살인도 일어나고 있다. 아무런 원한관계가 없는 제삼자를 자신의 분노로 인해 살인한다. 유아기의 상처, 사회의 상처, 관계의 상처의 끝에 온 파괴적 본능이 불특정 다수를 공격한다. 그들의 살인에는 모두 같은 동기가 있다. 자신도 피해자라는 정당화다. 그래서 자신이 피해자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공격하더라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당당하다.  


자신의 고통만큼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을 서로 느낄 수 있다면, 묻지 마 살인은 멈춰질까? 자신의 공격이 누군가의 고통이고 그것이 곧 자신이 느끼는 고통과 동일함을 자각하면, 범죄는 줄어들까? 인간이 서로의 아픔을 공감할 때 세상을 향한 반응도 달라지지 않을까? 


희주의 죽음을 통해 살인자 기범은 살인을 했을 때 보다 더 참혹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희주를 통해 자기 자신의 아픔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희주의 아픔도 본 것이다. 스스로를 파괴한 기범은 남을 파괴했고 그 파괴로 누군가를 또 파괴했다. 파괴된 희주는 기범에게 그 파괴성의 잔혹함을 자신의 고통으로  보여줘 살인자에게 색다른 복수를 한다.  


이 아프고 비통한 고통의 연결고리에 우리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여 모두 모른 척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마냥 분노만 해야 하는 것일까? 



Understnad different 

H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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