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어느덧 50여 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기성 언론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대선 중 여러 가지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기성 언론에서 대선 어젠다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이에 유튜브 채널에서 토론이 시작됐고, 후보들은 유튜브 쇼츠, 페이스북 단문 메시지를 메시지 유통 경로로 쓰고 있습니다. 언론 기사보다 커뮤니티에서의 반응이 선거운동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슬프게도 주요 후보들의 메시지와 일정을 종합해 병렬적 기사를 써온 기성 언론의 관행이 더 이상 시민들에게 수용되지 않는다는 뜻일 겁니다. 물론 매일매일 그날의 뉴스를 생산해야 하는 언론사의 입장에서 병렬적, 기계적 보도 태도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보도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대안을 찾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대선은 대한민국이 앞으로 5년 간 나아갈 방향을 진지하게 토론하는 장이 돼야 합니다. 이번 대선에서는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계속되는 코로나19의 위기를 극복하고, 전 세계적인 기술 패권 경쟁 시대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길을 찾아야 합니다. 미래 비전에 대한 후보들의 철학과 해법을 검증하는 게 무척 중요합니다.
언론이 물어야 할 과제는 너무나 많습니다. 한국의 산업군들을 어떻게 육성할지, 중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국가들과의 기술격차는 어떻게 확보할지, 미중관계 속에서 우리나라의 위치를 어떻게 할지, 갈수록 심화되는 북핵 위기 속에서 남북평화와 번영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말이죠.
정책 이야기를 하는 게 콘텐츠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는 고정관념은 이미 깨진 지 오래입니다. 자본시장에 대한 이해와 한국경제의 방향을 물었던 유튜브 채널 삼프로tv의 대선후보 초청 토론 시리즈는 조회수 합계 1000만 회를 훌쩍 넘은 상태입니다. 콘텐츠 소비자들은 정책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기자들이 이를 제대로 묻고 전달하는 노력을 안 했다는 걸 저부터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우리나라가 처한 근본적인 문제와 개혁 과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4차 산업혁명 시기에 현재의 학제와 교육 방식이 적절한지, 공무원 규모와 역할은 적절한지, 노인인구의 절반이 빈곤에 시달리는 현실을 어떻게 해결할지, OECD 자살률 1위의 현실을 극복할 방안은 무엇인지, 병역 자원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모병제 전환 등 군의 변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경제 분야에서 대중소기업의 격차 문제를 해결할 대안은 뭔지,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더 궁지로 몰리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갖출 방안을 계속 물어야 합니다.
대선 후보들이 표 때문에 답을 꺼려하는 문제도 언론이 대신 물어야 합니다. 2055년이면 적립금이 완전 소진됩니다. 지금의 20대는 혜택은 없고, 부담만 해야 하는 현행 국민연금 구조를 어떻게 개혁할지, 일부 대기업 정규직을 정점에 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이로 인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지, 4차 산업혁명 시기 일자리 상실의 대안으로 기본소득을 도입할 것인지, 성소수자 등에 대한 차별금지법 적용에 대한 입장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후보자가 어물쩍 넘어간다면 기자들이 계속 묻고 기사화해야겠지요.
물론 언론이 이런 역할을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훈토론, 방송기자 클럽 등 언론사가 후보들에게 장시간 질문을 던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검증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다만 일화성 이벤트를 넘어 언론의 일상 질문이 바뀌어야 선거보도의 질도 올라갈 수 있겠죠.
대선일이 가까워올수록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공약이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두 후보 모두 병사 월급 200만 원, 주택 250만 호 공급, 생애최초 주택 구입자 면세 등 재원이 드는 공약을 경쟁적으로 내놓기 때문이죠.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수조 원에서 수십조에 이르는 SOC 공약을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언론은 차분히 예상 재원과 공약 현실화 방안 따져야 합니다.
다행히 일부 언론사에서 공약 검증단이라는 이름으로 주요 후보의 공약에 대해 전문가들이 실현 가능성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여러 언론사로 확산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간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에 드는 예산을 합쳐서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해 보도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만합니다.
네거티브 팩트체크 나서야
이재명, 윤석열 후보 모두 본인을 비롯한 가족 전체가 온갖 네거티브 의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역대 최악의 대선이라는 푸념이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그만큼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나돌고 있고, 일부 극단적 성향의 유튜버들이 '묻지마 폭로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구독자의 성향에 따라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는 확증편향 현상이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토론의 기준을 잡아줄 언론의 팩트체크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입니다.
저도 많이 경험해봤지만 언론사 입장에서 주요 후보를 검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팩트 검증을 할 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데다 어떤 결과를 내놓든 특정 후보의 편을 든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언론사들이 제기되는 의혹에 대해 적극적으로 팩트체크를 하고, 가짜 뉴스의 확산을 막야야만 기성 언론의 역할이 재조명될 수 있습니다. 기본을 잘 지키는 일부터 신뢰 회복은 시작됩니다.
설 연휴 전에 KBS사에서 이재명, 윤석열 후보를 대상으로 한 토론 방송이 열릴 예정입니다. 토론에 목마른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늦게나마 반가운 일입니다.
대선 때마다 1위 후보는 토론을 기피하고, 추격하는 후보들이 토론을 요구하는 광경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언론사들이 주최하는 토론 기회가 더 많아져야 합니다.
물론 지상파, 종합편성채널 방송사들은 토론에 적극적이지만 후보 쪽이 비협조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현행 3회인 법정 토론 횟수를 더 늘리고, 후보자가 언론사의 합당한 요구에도 토론에 응하면 않으면 그 사람은 빼고 토론을 강제하는 방안까지 생각해볼 때입니다.
AI 후보가 등장하고, 메타버스가 선거운동에 활용되는 등 기술 변화가 선거운동을 변화시키는 걸 목격하는 대선입니다. 수요가 공급을 만드는 게 아니라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게 좀 더 진실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 이상 정책이나 검증에 대한 수요가 없다는 핑계로 언론사가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탁월한 콘텐츠를 공급하면 그만한 수요는 따라온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론의 대선보도 수준을 높이는 것은 단순히 기성 언론이 유권자에게 '패싱'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선거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중요한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