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괜찮은 삶이야

by MSG윤결



어느날 문득,

어릴 적 내가 어떤 일이 있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이젠 기억이 점점 흐려지나 보다.


분명히 무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선명한 장면보다는

감정만 남아서, 참 아프게 만들기도 한다.

어디서부터 아팠는지보다는

왜 난 늘 긴장과 아픔을 같이 느껴야했는지 싶었다.


기억이 흐려지는 게 망각인지, 아니면 이제야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증거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예전처럼 모든 장면을 붙잡고 살지는 않는다.


어릴 적의 나는 상황을 이해할 나이가 아니었고,

이유를 묻기엔 너무 조용한 아이였다.

그래서 많은 일들이 설명 없이 지나갔다.

지나간다는 말이 정확할까.

몸 어딘가에 남은 채로 조용히 쌓여갔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을 정확히 생각 하지 않는다.

사실을 증명할 필요도,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필요도

이제는 없다.

기억이 흐릿해졌다는 건 어쩌면 그 일들이 더 이상

나를 끌고 가지 않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가끔 멈춰 서서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잘 몰랐던 나.

그래도 하루를 버텨냈던 나.

그리고 그때의 내가 나를 이곳까지 이끌었다.

또, 모든 기억이 선명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삶은 흐릿해져야만 계속 앞으로 갈수만 있는것같다.


기억은 흐려졌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직 여기 있다.


예전에는 살아 있다는 말이 그저 결과처럼 느껴졌다.

어찌어찌 지나왔고, 어쩔 수 없이 남아 있었고,

그 정도였다.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여기까지 온다는 건 꽤 많은 선택의 결과였다.

도망치지 않은 날들, 버티기로 한 순간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하루를 마무리했던 밤들.


누군가는 대단하지 않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성공도 아니고, 극적인 반전도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를 끝까지 살아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요즘의 나는 행복을 크게 정의하지 않는다.

괜찮은 하루, 조금 덜 아픈 마음, 평온한 일상,

오늘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기억이 흐려진 대신 가슴속의 감정은 조금 선명해졌다.

사람의 말투, 공기의 온도, 나 자신이 긴장하는 순간들.

사람들의 시선, 그 모든것들에서 조금은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믿어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기를..


아마도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 삶일 것이다.

아주 반짝이지 않아도, 설명할 필요가 없어도.


기억이 흐려져도 괜찮다.

나는 이제 지나온 나보다 지금의 나와 앞으로의 나를

조금 더 오래 바라보고 싶다.

지나간 일들이야 이제와서 어쩌겠냐만은

많이 덜어내고 또 덜어내다보면 완전히 잊혀지는

날이 오지않을까?


과거로 인해, 누군가를 미워하는일

누군가를 원망하는일은 그만 멈추고싶다.


그리고 오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내 몫의 하루를 산다.


매일이 오늘만 같기를...


-윤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