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쨉쨉 훅-

by MSG윤결



인생이란 참 아이러니하다. 평온한 바다처럼 잔잔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거친 파도가 집을 삼킬 듯이 몰아친다. 불행은 결코 혼자 오는 법이 없어서,

꼭 한꺼번에 문을 두드린다. 아니, 문을 두드리는 예의조차 없다.


괜찮은 줄 알았다. 이제는 나름대로 삶의 요령도 생겼고, 웬만한 풍파에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다고 믿었다. 하지만 인생은 나의 자만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장 취약한 순간에 매서운 잽을 날린다.

툭, 툭. 가벼운 듯 날아오는 잽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묵직한 훅이 턱 끝을 스친다.

훅 하고 쳐내리는 그 한 방에 세상은 순식간에 암전 되고, 나는 링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찰나의 순간, 링 위를 비추는 조명만이 유독 눈이 시리게 차갑다.


어릴 적 보았던 어른들은 참 강해 보였다. 서른이 넘고, 마흔이 되면 어떤 풍랑 속에서도 평온함을 유지하는 거대한 바위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그 나이의 언저리에 서보니 깨닫게 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하나를 더 배운다는 소리지만, 그것이 곧 고통에 무뎌진다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정도 잽을 맞았으면 이제 제법 안 아파야 정상인데, 나는 여전히 매번 정신을 못 차린다.

상처 위에 굳은살이 박여야 할 자리에 자꾸만 새로운 생채기가 난다.


"괜찮겠지, 다 지나갈 거야, 결국 잘 해결될 거야"


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긍정의 말보다 가슴속을 파고드는 무서움이 늘 한 걸음 앞서 나간다. 어른이 되어도 겁쟁이인 건 여전하고, 삶의 무게는 덜어지는 법 없이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기만 한다.


문득 링 밖을 본다. 관중석에 앉아 나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내 옆에 또 다른 링 위에서 치열하게 주먹을 휘두르고, 때로는 나처럼 바닥을 구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 세상에 사연 없는 무덤 없듯, 사연 없는 삶 또한 없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무표정한 얼굴들,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조는 피곤한 눈동자들 뒤에는 각자가 감당해야 할 잽과 훅이 숨어 있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과 싸우고 있고, 누군가는 내일의 생계를 위해 자존심을 링 바닥에 내려놓았다. 남들도 다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거겠지,

생각하니 묘한 동질감과 함께 씁쓸한 위안이 찾아온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경기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복서들이다. 화려한 승리보다는 '버티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경기라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링을 떠나지 못한다. 아니, 떠나지 않는다.



인생은 왜 이리 어려운 것일까. 왜 신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주신다면서,

가끔은 그 한계를 시험하듯 가혹하게 구는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마 평생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오늘 다시 한번 가드를 올린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바닥에 떨어진 마우스피스를 다시 입에 문다. 내가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아니다.

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힘을 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맷집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이 경기를 끝까지 완주하고 싶다는 고집이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중요한 건 링 위에서 얼마나 강력한 펀치를 날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쓰러지고도 다시 일어섰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비틀거려도 좋다. 정신을 못 차려도 괜찮다. 잠시 링 바닥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어도 큰일 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카운트가 열 번이 다 차기 전에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그 마음,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어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링 중앙으로 나간다.

또다시 잽이 날아오고, 나는 또 아파할 것이다. 무서움은 여전히 나를 뒤흔들 테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고된 라운드가 기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이 링 위에는 나 혼자가 아니며, 내가 내딛는 이 서툰 스텝들이 모여 결국 나의 '삶'이라는 장엄한 서사가 완성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인생은 여전히 아이러니하고, 여전히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