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사랑스러운 레드북 - 뮤지컬 ‘레드북’ [공연]

넘버, 캐릭터, 스토리의 사랑스러운 삼위일체

by 윤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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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레드북〉은 보수적인 19세기 영국, 시대가 규정한 여성성을 거부하고 거침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안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야한 상상과 사랑 이야기를 말하는 데 재능을 지닌 그녀는 변호사 브라운의 응원에 힘입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시대, 첫사랑과의 추억을 가감 없이 써 내려간 안나의 소설은 세간의 관심을 끌지만, 동시에 거센 비난에 휩싸인다.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사랑을 말하는 뮤지컬 〈레드북〉. 이 작품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본 뮤지컬 중 단연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왜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지 넘버, 캐릭터, 스토리로 나누어 살펴보자.



① 귀를 사로잡는 넘버


아름답고 중독성 있는 노래야말로 연극이 아닌 뮤지컬을 선택하는 이유일 테다. 뮤지컬〈레드북〉의 넘버들은 대중적이고 사랑스럽다. 한창 온라인에서 바이럴 되었던 ‘사랑은 마치 Reprise’와 대표 넘버인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외에도 좋은 넘버가 가득하다.


“우리는 나머지”라고 외치는 앙상블의 합창으로 시작해,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거절당하며 “난 뭐지?” 의문을 품는 안나의 목소리로 이어지는 오프닝 넘버부터 귀를 사로잡는다. 이후 자신을 희롱하는 빵집 주인에게 대항하다가 외려 유치장에 갇힌 안나가 슬플 땐 야한 상상을 한다며 부르는 ‘올빼미를 불러’는 익살스러우면서도 포근하다.


야하고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쓴다는 설정인 만큼 작품 전반적으로 발랄하고 경쾌한 넘버들이 많다. 그중 사람들이 낯부끄러워하면서도 레드북을 끊임없이 찾는 상황을 그린 ‘어머나 세상에 맙소사’와 브라운이 안나의 소설에 빠져드는 ‘낡은 침대를 타고’는 재기 발랄한 가사, 앙상블 배우들의 화음, 센스 있는 연출이 맞물려 다채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의외로 가장 인상적인 넘버 중 하나는 ‘우리는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이다. 여성 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의 멤버들이 안나를 환영하고 본인들을 소개하며 부르는 넘버인데, 스페인 무곡 파소도블레를 참고했다는 작곡가의 말처럼 강렬한 리듬과 매혹적인 멜로디가 돋보인다. 풍부한 화음과 돌림노래, 어두운 톤의 조명과 라틴 댄스가 어우러져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인데, 가사까지 곱씹으면 감탄마저 나올 정도다.


우리는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 / 이 작은 펜으로 커다란 성을 지어
철학으로 올린 지붕과 / 신념으로 세운 기둥들
상징으로 만든 계단과 / 비유들로 꾸민 가구들
아직은 어린 단어들이 찾아오는 성 / 여물지 않은 문장들이 자라나는 성
언젠간 그들이 문학이 될 수 있게 /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 수 있게 성을 지어
(중략)
억눌려온 욕망을 일으켜 / 넘쳐나는 광기를 불태워 / 오직 나를 위한 길을 찾아


미숙한 실력마저 아름다운 표현으로 긍정하고, 욕망과 광기를 불태우겠다고 기세등등하게 외치는 그녀들의 모습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② 사랑스러울 기회를 얻은 캐릭터들


어떤 서사 작품이든 인물이 매력적이어야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주변 인물들은 주인공의 시련과 고난으로 기능하는 데 그치기도 한다. 그런데 뮤지컬 〈레드북〉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거의 모든 인물들이 사랑스럽게 표현된다.


주인공 안나는 물론 매력적이다. 그녀는 시대의 도덕과 관습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감정에 충실하다. 모욕에는 두 배로 돌려주고, 좋아하는 남자더라도 답답하게 굴면 언성을 높이지만, 마음이 풀리면 먼저 입을 맞추고 집으로 함께 가자며 애정을 숨김없이 표현하는 인물이다. 여기에 능청스럽고도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까지 갖춰 단숨에 관객을 매료시킨다.


그녀의 연인 브라운 역시 흥미롭다. 겉보기엔 점잖고 준수한 신사지만, 알고 보면 고지식하고 어딘지 하찮은 인물로 그려진다.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무시하다가 결국 안나에게 수줍고도 소심하게 마음을 고백하고 만다. 중세, 근대 유럽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속 남자주인공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브라운의 찌질하고 인간적인 면모는 신선한 매력과 재미를 선사한다.


또한 〈레드북〉은 빌런에 그칠 수도 있었을 인물들에 사랑스러움을 한 방울 가미한다. 그 시대 신사들의 허세를 날카롭게 비판한다고 해서 이미 현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이 큰 통쾌함을 느낄 리 없다. 그래서 작품은 신사의 도리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잭과 앤디를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귀엽게 그려내고, 결국 그들을 재판의 증인으로 세우며 안나를 돕게 만든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보수적인 판사들은 브라운의 설득 끝에 엄숙하게 여성의 이혼 신청을 허락하는 데 멈추지 않는다. 앞으로 달려나와 유쾌한 율동과 함께 ‘사랑은 마치 마치 마치’를 외치며 발랄한 매력을 뽐낸다. 안나가 서게 된 법정 속 인물들도 단지 안나에게 시련을 주는 역할로만 머물지 않는다. 레드북을 읽고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법무원의 아내, 검사의 약혼녀, 판사의 어머니의 후기를 통해 그들이 여자들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간적인 매력을 더한다.


이처럼 〈레드북〉의 인물들은 모두 사랑스러워질 기회를 부여받는다.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많은 만큼, 관객은 극에 대한 애정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③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스토리


〈레드북〉은 보수적인 시대에 야한 이야기를 쓴다는 참신한 설정을 보편적 서사로 풀어내 공감과 몰입을 끌어낸다.


우선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을 따른다. 안나는 브라운에게 끌림을 느끼지만,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지식하게 구는 그의 태도에 대립한다. 브라운 또한 규범을 따르지 않는 안나에게 괜히 화를 내고 애써 마음을 부정하려고 하지만, 결국 먼저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하다가 결국 사랑을 확인하는 이들의 관계는, 수많은 드라마에서 반복되어 온 이른바 ‘혐관’ 로맨스의 정석을 따른다. 오래된 클리셰지만, 그만큼 손쉽게 몰입과 재미를 끌어내는 강력한 설정이다. 서로 화를 내다가도 사랑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맞추는 주인공 커플의 모습은 짜릿한 재미를 선사한다. 더구나 남자 주인공에게 대립하는 여자 주인공을 보기 드문 뮤지컬 장르에서는 신선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주인공 안나의 자기 수용 서사는 코미디에 애틋함을 더한다. 자기 정체성을 혼란스러워하던 주인공이 결국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여정은 항상 뭉클함을 준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그 어떤 것보다도 어렵고도 절실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차면서도 “난 뭐지?” 방황하던 안나가 결국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외치는 순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울컥하게 만든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나로서 충분해 / 괜찮아 이젠


중독성 강한 넘버와 사랑스러운 캐릭터, 참신하면서도 친근한 스토리까지, 〈레드북〉은 뮤지컬에서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완벽히 들어맞는 뛰어난 작품이다. 느슨한 개연성이나 아쉬운 넘버에 지쳤던 사람들에게 이 작품을 자신 있게 추천하고 싶다. 넘치는 사랑스러움에 빠져 울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8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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