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고
삶의 윤기가 사라진 것 같은 날들이 있다. 반복되는 일상의 면면들이 딱딱하게만 느껴질 때. 그럴 때는 스스로 시인들의 에세이를 처방한다. 거듭 말해왔듯, 생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데 탁월한 이들의 사유를 손쉽게 받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문장을 읽으면 삶에 다시 훈기가 도는 것 같다. 비슷한 이유와 목적으로 찾게 되는 시인 아닌 작가가 있는데, 시인들만큼이나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신형철 평론가다.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고등학교 때였다. 한자로 ‘문학개론’이라고 씌어진 책을 주교재로 쓰며 문학소녀의 지적 허영을 충실히 채워주던 수업이었다. 선생님은 『몰락의 에티카』의 글 하나를 발췌해 나눠주셨다. 지금 읽기엔 어렵겠지만 꼭 읽어볼 만한 평론집이라고 하면서. 선생님의 말씀대로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엄숙하고 경건해보이는 책 제목이 아주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머릿속 한구석에 그 이름이 남았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대학에 입학한 뒤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빌려보았다. 그해 발간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었다. 그러나 스무살의 나는 타인의 슬픔에 깊은 관심을 가질 만큼 성숙하지 못했으므로, 몇 장 읽지도 않고 도로 반납했다. 시간이 더 지나, 지적 허영과 감수성이 차오르던 어느 날,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사랑이라면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분명히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렇지만 또 독파에 실패했고, 결국 책장에서 몇 년을 더 묵혔다가 작년에야 완독해냈다.
8년 만에야 제대로 읽은 그의 글은 상상하던 것과 아주 달랐다. 나는 그때까지 평론가라는 직업이 풍기는 냉철하고 엄격한 이미지, 세 글자 모두 밑받침까지 빽빽하며 거센 소리를 내는 이름, 『몰락의 에티카』라는 장엄한 제목과 같은 글을 상상했었다. (아마 그래서 읽기를 더욱 미뤄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책 제목과 같이 정확한 사랑의 문장을 쓰는 사람이었다.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문학처럼 아름다운 문장에 담아 전했다. 책머리에서부터 본인의 장기를 한껏 발휘하는 저자의 솜씨에 감탄이 나왔다. 곧장 본문을 읽는답시고 서문을 건너뛰었던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서문을 다 읽은 순간, 이십년간 문단과 대중이 그래왔듯 나도 그의 글을 사랑하게 됐다.
그는 자신을 해석자라고 말하며 서문을 연다. 해석자의 꿈은 가장 좋은 해석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장승리의 시 「말」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내게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작품들이 세상의 모든 해석자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면 해석자의 꿈이란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는 일일 것이다.
나를 처음 놀라게 만들었던 문장이다. 해석이 사랑의 다른 말이라는 것은 낯설지 않다. 트위터만 보더라도 덕후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텍스트를 샅샅이 파헤치는 일은 넘쳐나니까. 그러나 비평을 직업 삼는 사람, 그러니까 작품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심판해야 할 것 같은 사람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좀 이질적이었다. 그에게 품고 있던 선입견이 깨지기 시작했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단언을 즐기는 사람들도 당사자의 면전에서는 잘 그러지 못합니다. 어쩌면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늘 작품을 앞에 세워두는 글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저는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섬세해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섬세한 사람이 되어볼 수는 없을까 생각합니다. 저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실험해보고 싶습니다. 이 말은, 제가 실제로는 섬세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고, 그래서 계속 비평을 열심히 쓰겠다는 뜻입니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라는 것. 평론가에 품고 있던 편견과 정반대되는 말에 한번 놀라고,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섬세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에 또 놀랐다. ‘가장’ 섬세해지고 싶다고 선언하는 저 사람은 대체 얼마나 섬세한 사람인 걸까.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저런 소망을 품는 자체가 이미 섬세한 사람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순간 한 겹 남은 무장마저 전부 해제됐다.
둔한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책을 읽을 때처럼 영화를 보고 또 보는 것뿐이었다. 한편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대여섯 번 보고 나서 열 줄로 이루어진 단락 열네 개를 쓰고 나면 한 달이 갔다. 누군가에게는 이 책이 부정확한 사랑의 폐허로 보이겠지만,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 책은 그가 씨네21에서 연재했던 영화 비평을 모은 것인데, 신형철은 자신이 문학평론가이므로 영화를 일종의 활동서사로 간주하고 비평을 썼다고 밝히며 위처럼 말한다. 남다른 달인의 경지에 이른 듯한 사람이, 본인은 둔한 사람이라 성실히 노력했다고 말하는 겸손함은 애틋하게까지 느껴진다. 변명을 앞세우는 게 습관인 나로서는 부럽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깨끗한 충격을 주는 이 머리글은 여느 책처럼 출판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마무리되는데, 마지막 문장은 서문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내 아내 신샛별은 이 책이 다룬 거의 모든 영화를 함께 보았고 최상의 토론 상대자가 되어주었으니 사실상 공동 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 실린 글 중 하나를 나는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썼다. 그녀를 정확히 사랑하는 일로 남은 생이 살아질 것이다.
해석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한 사랑을 말하더니, 이제는 아내를 정확히 사랑하겠다고 얘기한다. 작가들이 반려자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전하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이렇게 터무니없이 낭만적인 땡스투는 처음이었다. 이런 문장이 평론가의 글에서 나오는 것이 맞나? ‘살 것이다’라는 다짐도 아니고 절대적인 힘에 이끌리듯, 이미 그렇게 운명지어졌다는 듯 ‘살아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평론가라니.
고작 세 페이지에 불과한 서문에만 무수한 밑줄을 긋게 만든 그의 통찰력과 미문은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날개를 펼친다. 감독이 함축해놓은 삶의 속성과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풍부한 지식과 지혜로 해석해내 유려한 문장으로 설명한다. 그가 풀이한 생의 내밀한 속성을 알게 될 때마다 시야가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해석하는 영화 대부분을 보지 않았음에도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다. 서문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그의 문장들은 아름다우면서도 담백해서 깊은 사유도 편하게 소화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좋았던 것은, 인생에 대한 지혜만큼이나 글쓰기에 대한 유용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생각의 흐름을 자세히 좇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는 어떤 것이 좋은 이야기이고 어떻게 해야 좋은 해석을 할 수 있는지 보다 친절하게 일러준다. 기초도 없이 감에 따라서 작품을 감상하고 비평하던 나에게는 아주 귀중한 조언이었다.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겉멋 잔뜩 든 문장을 쓰고 싶을 때마다, 다가오는 마감에 초조해하며 글을 쓸 때마다 떠올리려고 하는 대목이다. 현학적이거나 관습적인 문장이 아니라, 내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그것을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한 문장을 써야 한다고. 그가 다른 책 서문에 쓴 것처럼,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정확한 문장을 찾아야 한다. 소리만 요란한 텅 빈 문장들로 날림공사를 하면 안된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세 단계를 차례로 밟아가는 일이다. 그 세 단계를 각각 ‘주석’ ‘해석’ ‘배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의 ‘사실’ 관계를 확인해야 하고(주석), 확인된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해내야 하며(해석), 이렇게 추론된 의미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평가하면서 그 텍스트가 놓일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배치).
‘주석’은 최대한의 정확성을, ‘해석’은 최대한의 단독성을, ‘배치’는 최대한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어떤 텍스트가 최대한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배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텍스트를 세상에서 하나뿐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며, 그것이 바로 ‘해석’이라 불리는 행위의 이상(理想)일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써 온 비평과 리뷰는 반쪽도 아닌 1/3에 다름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거의 항상 작품의 메시지를 보편성의 관점에서만 읽어내려고 했다. 하나의 명확한 주제를 찾아내서, 그에 기반해 몇 가지 요소를 설명하면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텍스트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의 작품은 단일한 메시지가 아니라 복잡한 맥락과 의도를 품고 있다. 전래동화를 읽을 때처럼, 국어 시험 공부를 할 때처럼 하나의 명확한 주제를 찾으려고 드는 것은 그다지 좋은 태도가 아니다. 우리 삶은 객관식처럼 답이 딱 떨어지지 않고, 온갖 요소들이 얽히고설켜 복잡하고 애매모호하다. 삶을 그려내는 작품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삶을 깊게 들여다본 작품이라면 더더욱. 사람이든 작품이든 간편히 분류하는 게 아니라 복합적인 고유성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인간관계이자 해석이라는 것을 되새긴다.
나는 지금 리얼리스트의 자리에서 이 영화의 탈역사성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비판은 이제 너무 낡아서 비평가의 자기만족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감독이 하려고 하지 않은 것을 왜 하지 않았느냐고 비판하는 것은 재미없는 일이다. 하려고 한 것을 어떻게 해냈는지를 물어야 한다.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과연 그랬다. 이미 낡은 비판, 새로운 충격이나 인식을 주지 못하는 비평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런 건 누구나 말할 수 있으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은 역시 작품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창작자가 무엇을 왜 하고자 했는지,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냈는지 살펴보는 것. 어떤 작품을 이미 진부한 지식과 관념으로 나무라며 고상한 척 굴고 싶어질 때마다 이 말을 기억해야겠다.
결국 그가 줄곧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 같다. 사람이나 작품을 손쉽게 규정하지 말고, 제각각의 진실에 귀 기울여보라고. 모호한 것은 거추장스럽고 성가시다. 우리는 ‘어떤 것은 무엇이다’ 라고 분명하게 분류할 때 안심을 느낀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진실에서 멀어지는 일이다. 모호함이 주는 성가심만큼이나 마음 불편한 일이다. 마치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놀러나갈 때의 찜찜함처럼. 그러니 어딘가 찜찜한 편리를 택하기보다, 어렵지만 정확한 길을 택해야지. 물론 또 패스트푸드를 먹고 릴스를 보면서 뭉툭한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신형철의 글을 자주 읽으며 그를 닮아가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