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타, 성녀와 악녀 사이
뮤지컬 속 선량하고 양심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보며 뭔지 모를 갈증을 느껴온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테다. 지난 주말, 그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준 작품을 만났다. 야망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리는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뮤지컬 〈에비타〉다.
뮤지컬〈에비타〉는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이자 빈민과 노동자들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에바 페론’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캣츠〉, 〈오페라의 유령〉으로 유명한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작곡하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만든 팀 라이스가 작사해 1978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되었다. 국내에서는 2006년 초연, 2011년 재연 후 올해 14년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뮤지컬을 좋아한지 몇 년 되지 않은 나에게 〈에비타〉는 다소 생소한 작품이었다. 오래 전 만들어진 작품이니만큼 고리타분하지 않을까 우려도 들었다. 하지만 기우였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서사와 넘버, 연출 모두 놀라울 만큼 세련된 감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연 주인공 에비타, 에바 페론이었다. 지금까지 본 뮤지컬 여성 캐릭터 중 가장 매력을 느낀 인물이었다. 가난한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출세를 위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결국 아르헨티나의 영부인 자리에 오른다. 그 과정에서 남자들을 이용하고, 권력을 쥔 후안 페론을 유혹하며 그의 연인을 쫓아내기도 한다. 야망에 찬 악녀의 모습을 보여주던 에비타는 영부인이 되고 난 후 빈민과 노동자, 여성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얻는다. 실제로도 성녀와 악녀 사이에서 평가가 갈릴 만큼 다면적인 에비타의 모습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특히 순결하고 선한 여성상이 주로 등장하는 대형 뮤지컬의 문법 속에서,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에비타는 더욱 신선하고 파격적으로 다가온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성공을 꿈꾸고, 대담한 연설로 군중을 사로잡으며, 뜻을 굽히지 않는 집념을 가진 그녀는 누구나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작품은 관객이 에비타에게 보다 쉽게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하나의 시선을 덧댄다. 에바 페론의 삶을 따라가며 극을 이끄는 나레이터 체다. 그는 냉소적인 태도로 에비타를 해설하고 때로는 노골적으로 빈정거린다. 에비타는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인물인 만큼, 그녀의 내면에만 집중해 극이 전개됐다면 오히려 반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체가 의심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맡아주면서 관객은 회의와 경계를 내려놓고 에비타에게 몰입할 수 있다. 또한 에비타는 아무리 멋있게 그려지는 순간에도, 그 모습을 냉소하는 체의 시선 때문에 항상 불안과 긴장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 아슬아슬함 때문에 관객은 에비타에게 더욱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다. 체는 그 자체로도 매력적인 캐릭터이지만, 무엇보다 극의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에비타에 대한 공감을 더 용이하게 만드는 장치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작품답게 넘버 역시 귀에 쏙쏙 박혔다. 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탱고와 라틴 리듬이 활용된 음악들로 채워져 있는데, 이 매혹적인 라틴 리듬과 선율은 에비타의 매력을 배가시켰다. 고음과 저음을 넘나드는 화려한 고난도의 넘버들은 관객들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든다.
연출 또한 세련됐다. 〈에비타〉는 무대 장치가 거의 없는 대신 대규모 앙상블 배우들의 퍼포먼스로 무대를 채운다. 무채색의 간결한 의상을 맞춰 입고 선보이는 군무는 마치 현대무용 공연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다채로운 색과 거대한 세트로 꾸며진 뮤지컬과는 또 다른 스펙터클이다. 세트가 적은 만큼 조명과 영상이 적극적으로 활용됐는데, 특히 에비타의 마지막 연설 장면을 흑백 라이브 영상으로 중계해 당시 뉴스 화면처럼 연출한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야망 넘치는 매력적인 여성 주인공과 중독적인 넘버, 세련된 연출이 결합된 뮤지컬 〈에비타〉. 올해가 가기 전 또 이렇게 훌륭한 뮤지컬 작품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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