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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바람 Jun 18. 2022

해 지는 경포해변에 앉아서...

엄마도 맘대로 살고 싶다 2

  오후 5시 54분 정동진역 출발 강릉행 기차를 타고 6시 조금 넘어 강릉역에 도착했다.

속초에는 여러 번 가 보았지만  강릉은  참으로 낯선 곳이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설악산으로 갔었는데  잠깐 경포해변에 들렸던 것이 기억의 전부이다. 그때 동해의 푸른 바다와 파도가 정말 좋은 기억으로 남았었는데  몇십 년 만에  울적한 마음으로 떠난 하루 여행의  마무리 장소가 되었다.

강릉역은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 덕분인지 너무 넓고 깔끔해서  좋은 인상을 주었다.


  역을  나와  경포 해변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배차 시간이 너무 길어 더운 날씨에 30분은 기다려야 했다.

택시를 타야 하나 갈등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출발이 10시 인지라  딱히 서두르지 않아도 되어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때  어느 70대 초반쯤 돼 보이시는  남자 어르신이 오는 버스마다  터미널을 가냐고 운기사에게 물어보시는 게 보였다.

버스 기사님들은  아니라고 고개만 성의 없이 흔들고 가버린다. 몇 번이라든지  만약 정류장이 틀렸으면 잘 알려주면 좋을 텐데....

한글을 모르실 연세는 아닌 거 같은데 초행이신가....?

나는 나도 초행이지만 노선표를 보고 찾아서  묻지도 않은 어르신께  302번 버스를 조금만 기다렸다 타시면 된다고 오지랖을 부렸다.

잠시 후 고맙다며 순박한 웃음 뒤에 버스에 오르신 어르신이  떠난 후 나는 갑자기 자가 반성 모드로 돌입했다.


  나는  왜  낯선 이에게는  친절하지?

아들에게 전날 저녁 좋은 말을 해주지 못하고  또 거친 말이  나올까 두려워 집을 떠나온 오늘.. 이  낯선 곳에서 낯선 이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평소에도 스스로 내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며 자가 진단하는 근거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더운 여름날에  낯선 도시의 버스정류장에서 자기 성찰을 하게 된 것이다.

아마  나와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을 거 같다.

집에서는 가부장적 아버지가 밖에서는 호인 소리를 듣는다던지  문 밖으로 아이를 혼내는 소리가 자주 들리는 집의  엄마가 밖에서는 아주 상냥한 아주머니라든지 하는 소리를 많이 들어볼 수 있으니 말이다.


짧은 생각으로 내린 나의 결론이다.

첫째는  사람은 누구나 착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거창하게 성선설 까지는 아니고  착한 본성과 더불어 좋은 사랑이고 싶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길 바라는 자기 욕구가  합쳐져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둘째는  낯선 이에게는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댓가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느끼는 희로애락이 어쩌면 기대와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는 그 기대와 다를 때 더 화나고 더  서운하고 실망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낯선 이는 그냥 자신과 무관한 사람이기에 아무 기대도 없으니 자연스럽게 친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엄청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도착한 경포해변.

올 때는 혼자서 물회도 먹고 전망 좋은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리라 했는데  감성 충만한 해변의 모습과 달리 상가마다  가족여행객들로 넘쳐서 혼자 온 사람을 주눅 들게 했다.

해지는 해변을 보고 앉아  엄마로서의 감정과 한 개인으로서의  이성을 저울질하며  집으로 돌아가서는  나의 기댓값을 내려서 친절지수를 올려보리라 생각했다.

조금 걷다가 버스를 타야지 하며 온 길을 되짚어 한참을 걸었는데도 좀처럼 버스 정류장도 지나가는 버스도 보이지 않았다.

한 20분을 걸어서 겨우 나타난 정류장 전광판에는 (운행버스 없음) 표시가 있고 시간을 보니 마지막 버스가 떠난 뒤였다. 8시 30분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겨우 택시를 타고 강릉역에 도착하니 식당가도 다 문을 닫았다.

도넛 하나와 커피를 사서  넓은 대합실에서 1시간을  보내고 10시발 기차를 탔다.


  집 나간 지  약  11시간 만에  집에 돌아왔다.

에서 정동진 그리고 강릉 거쳐 다시 집.

맘대로 시간 보낸 하루와  뒤에 오는 하루가 다를 바 없지만

집에 있었으면 아들에게 쏟아냈을  확률이 높은

거친 말을  하지 않았고  나름의  자기 진단과 함께 생각을 정리하고  좋은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어서  다행인 하루였다.


생각정리 한 줄

남에게 친절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을  가족에게도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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