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선 뭐 입지?

여행 그 밖에

by 가을바람

"○○ 아!

우리 이번 여행에서는 옷 짐좀 줄이자. 서로 후드티 같은 건 돌려 입어도 되니까 효율적으로 해보자."


12박 14일의 여행을 앞두고 내가 호기롭게 던진 말이다.

나만 여자인지라 옷차림이 많이 겹칠 수는 없어도 체지방은 가족 중 일등사수인지라 성별구분 없이 맨투맨이나 후드티는 아들 것도 즐겨 입는 터였다.

그러나

짐을 챙기기 전부터 머릿속으로는 이리저리 가진 옷들의 코디네이션을 해보며

'이건 가져가야지'

'저것도 쓸만하지'

'이렇게 저렇게 맞춰 입으면 봐줄 만하지'

하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빼고 가면 서운할 거 같아 옷 짐이 예상보다 많아졌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옷욕심이 있고 나를 닮았는지 큰아들도 옷 쇼핑을 즐긴다.

아주 오래오래 전 대학 신입생 때의 일이다.

작은 소읍의 고등학교에서는 당시 소위 메이커라 불리던 신발을 신은 친구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대학에 가보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메이커 운동화에 랜드로버나 영에이지 단화를 신고 있어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었다.

방학에 아르바이트비를 받자마자 랜드로버매장으로 바람같이 달려가서 혼자 신발을 살 만큼 겉치레에 대한 욕망이 있었나 보다.


'내가 비싼 옷을 사는 것도 아니고 살까 말까 망설이며 스트레스받느니 맘에 들고 적절한 금액이면 사자'

나의 평소 옷 쇼핑에 대한 주관이다 보니 언뜻 보면 비슷한 패턴과 디자인의 옷들이 옷장을 점령하고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는 건 사는 것이요 입는 건 또 달라서 손이 가는 옷은 정해져 있고 바깥공기를 한 번도 못 맡고 계절이 지나버리는 옷들도 많다.

친구에게 농담반진담반으로

사놓은 옷이 너무 많아 밖에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말할 정도이니 말이다.


아무튼

이번 여행을 앞두고도 평소에 좀 쑥스러워서 못 입었던 쨍한 원피스 두 벌을 야심 차게 가져갔지만

스페인의 어느 도시에서도 화려한 색의 옷을 마주치지 못했다.

모두들 여행자체에 집중하지 옷차림에는 무신경해 보였다.

그냥 동네 마실 나온듯한 차림이 많았다.

그러고 보면

모두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겉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 거 같다.

우리는 옷가게에 옷을 사러 갈 때는

더 잘 입고 가야 한다는 게 암묵적 룰이니까....

나도 고상한 여행자 코스프레를 하며 가져간 옷 중에 편하고 만만한 옷들만 입다 보니 결국에는 여행용 가방에서 이리저리 구박만 받다가 온 옷들이 생겼다.

짐을 챙기면서 예상가능했던 결말이다.


출발 전 실천을 다짐하는 헛소리 덕에 그나마 짐을 조금은 줄였다고 생각했는데도 여행짐 싸기는 쉽지 않다.

인증샷을 남기려는 젊은 세대도 아닌데

여행 가기 전 여행 가서 뭐 입을지 신경을 쓰는 나.

아직은 하수임이 분명하다.

돌아와서 생각하면

모두 부질없었는데 말이다.

옷차림보다 더 중요한 걸 놓치고 온 건 아닐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