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꼬불꼬불 돌아오는 길
하굣길, 집으로 가는 길에 같은 동네 친구를 만났습니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였습니다. 저는 그 친구들과 동네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라 그런지 마음 맞는 날 같이 노는 친구일 뿐, 굉장히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던 것이죠, 그때 저는 초등학교 1학년. 그 친구들은 길을 가고 있는 저를 뒤에서 따라오며 험담하기 시작했습니다. 듣고 있자니, 그냥 재수 없다는 말들이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궁금했던 저는, “너네 나한테 왜 그러냐? 놀리지 마라.”라며 쏘아붙였습니다. 제 말을 들은 여자아이는 얼굴이 벌게지는 듯하더니 “저 재수 없는 게.”라는 말 뒤에 욕을 하며 다가오더니 저를 밀쳐냈습니다. 문제는 제가 밀려나 넘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그쪽은 학교 뒤쪽이었는데, 아무나 들어올 수 없게 공사장에서나 볼 법한 가시가 튀어나온 철근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으로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릎만 찍혔을 뿐 다른 곳은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릎 깊게 박힌 뾰족한 철근은 아침에 신고 간 하얀 스타킹을 발목까지 빨갛게 만들었습니다. 다친 저를 보고도 그 아이들은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저는 혼자서 엉엉 울며, 아프고 속상한 마음 담아 그 애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혼자 남은 저는 무릎에 박힌 가시 철근을 살점과 도려내어 빼내며 다시는 그 애들을 만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매일 샤워하며 보는 무릎의 상처들 때문에 더더욱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이제 와 생각해봐도 그 어린아이가 재수 없어 봐야 얼마나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저는 여전히 화가 납니다. 특히 저는 그 아이 외에 다른 친구나 언니, 오빠들과는 매우 잘 지내던 편이라 이해할 수가 없었죠.
저는 다친 다리를 절뚝대며 30~40분을 걸어 집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흐르던 피는 멈췄지만 걸어오는 내내 울면서 왔는데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나를 보고도 더러워진 옷을 받아 들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없이 약을 발라 줄 뿐이었지요. 약을 발라주는 엄마에게
“엄마, 나 앞집 애가 밀어서 넘어졌어.”라고 말을 전했지만
“응, 그래서 옷이 더럽구나. 알았어.”라응 대답뿐이었습니다.
희미한 기억 속의 엄마와의 대화는 이렇게나 짧았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어린 마음에 조금만 더 물어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 만도 한데, 왜인지 저도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은 채,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속상한 마음이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같은 동네의 옆집에 살던 작은 엄마가 다가오더니 “너 싸웠니?”라고 하며, 그 애와의 일을 저에게 말하는 겁니다. 싸웠다는 말에 화가 난 저는 “걔 웃기는 앤 데요. 싸운 거 아니에요. 걔가 욕하고, 나를 밀친 거예요. 걔 진짜 못됐네요. 그런 얘기를 왜 작은 엄마한테 해요?”라며 울분을 토했습니다. 억울했습니다. 싸워서 저도 밀치거나 한 대라도 때리기라도 했더라면 싸웠다는 그 말에 그리 화를 내지는 않았을 텐데. 저는 일방적으로 당한 피해자인데 말이죠. 그 소식을 들은 건지 어느 날 엄마는 우리 둘의 화해를 위해 곧 그 애 엄마와 저녁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때는 좀처럼 먹기 힘들었던 경양식 돈가스를 먹자고 했지만 저는 싫다고 우겼습니다. 결국, 왜 너만 생각하느냐는 엄마의 말에 어쩔 수 없이 화해하러 갔습니다. 어떤 결과가 있었을까요? 네, 저희는 아예 등을 돌렸습니다. 또한, 저는 작은 엄마에게서도 마음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 둘을 이간질 한 건 작은엄마였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설명을 해줘도 제 말이 아닌 작은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만 믿는 그 애와 돈가스를 먹으면서 한바탕 싸웠습니다.
아무도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서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때가 오랜 시간 지속하였을 뿐 나의 서운한 마음은 달래 지지 않았습니다. 그 해소되지 않은 서운함은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 어두운 서운함에 밝은 빛이 스며드는 날이 드디어 왔습니다.
몇 주 전 친정에서 예전 이야기들을 나누며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그때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그때 나 여기 무릎 다친 거 알아?”
“그게 뭔데?”
“나 초등학교 1학년 때 다리 다쳐서 왔잖아. 피 엄청났는데. 아직도 흉터 있어.”
“그러니?”
“그때 그래서 엄마랑 아줌마랑 넷이 돈가스 먹었는데”
“아, 맞다. 그때 싸운 거 아니야? 작은엄마가 중간에서 전한 말 때문에 싸운 걸로 아는데?”
“아니야, 넘어져서 철심 박힐 뻔했어. 싸웠다는 말은 억울해. 나한테 미안하다고도 안 하고 도망갔는데,”
“근데 그날 화해 안 했나?”
“돈가스 먹다가도 싸웠는데.”
“돈가스 먹은 건 기억나는데.”
“그리고 난 걔한테 욕을 한 적도 없는데 작은엄마가 없는 말 지어낸 거라고.”
“그래, 그건 나중에 알았어.”
(정적)
아이고, 어머님. 어쩌면 딸에게 그리도 관심이 없으셨나요.
그래도 돌고 돌아 이렇게 지금의 엄마는 내 서운함을 알아주셨고, 저 또한 엄마의 미안해하는 마음을 느낍니다. 아주 잠깐 멈춰진 대화는 어쩌면 서로의 마음을 읽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오래된 서운함을 이야기하는 건, 사실 쉽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어떻게 생각할지 불안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때로는 저처럼 뜬금없이 이야기를 꺼내 보는 것을 추천해 봅니다. 어쩌면 상대방은 나의 서운한 마음을 정말로 알아채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서운했다는 마음을 부드럽지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덧붙이자면 이런 서운한 마음을 더욱 빨리 털어냈다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오늘은 마음 깊게 자리 잡았던 누군가에 대한 서운함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방과 이야기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달콤한 초콜릿과 함께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