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망설이다가 노트를 덮고, 무작정 걷기를 반복했다. 길을 걸어도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고 아무것도 느끼질 못했다.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다 바지 주머니에 넣길 반복했다.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남는 구절이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책이라도 펼쳐놓고 읽다가 덮어두곤 했다. 그러다가 TV를 켜고 드라마를 봤다. 그마저도 지겨워지면 다시 방에 들어와 그림책을 보았다. 그림이라도 그리면 좋아질까 싶어서. 하지만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다.
시간과 공간은 머물러있지만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여백도 느낄 수 없었다. 시간과 공간 중간 어느 지점에서 맴돌고 있는 듯했다. 세상 속에 속해있지 못한 채 바람처럼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을 죽이고 마음을 죽인 채 흘러가는 시간 속에 무언가를 하고 싶은 의욕조차 잊고 있었다.
떠나고만 싶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채, 나란 존재를 모르는 어느 낯선 곳으로 가고만 싶었다. 세상은 내가 꿈꿔왔던 세계와 너무나 달랐다. 마음에 샘솟는 꽃과 같은 감성은 수채 구멍 속 구정물 속에 잠겨버렸다. 내년이나 그 후년에는 떠나야지. 생각하다가도 거기도 여기와 별 다를 것이 없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려면 영어학원에라도 등록할까 싶어 영어 학원 간판이 보이는 건물 앞에 몇 번이나 서성거리다 돌아오곤 했다.
그림책 세상 속 아이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우주 먼 공간으로 여행을 떠났다. 빈민촌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자폐증을 앓고 있는 친구를 따라 저 멀리 우주 공간으로 여행을 떠났다. 상상력이 고갈되면 다시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으로 돌아와야 했기에... 우주 공간을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그림책의 내용이 다른 날과 다르게 슬프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느끼는 상상 속세계와 현실 속세계는 확연히 달랐다.
아픔과 절망은 저 밑바닥 아래로 잠식해 들어갔다. 하지만 저 멀리 이상의 세계는 행복하고 따뜻하기만 했다.
아픔도 절망도 체념이라는 더러운 물속에 잠겨 저 먼 세상조차 꿈꿀 수 없게 된 지금의 나는... 시간과 공간 중간 지점에 멈추어 서서 어느 쪽에 속해야 할지조차 모르고 있다. 망설임은 세계를 잃어버린 사람의 것이다.
유달리 밤공기가 습했다. 하늘은 까맣지도, 환하지도 못한 채 뿌연 안개가 끼어있다. 그 한가운데 어슴푸레한 달 하나가 떠 있었다. 반만 떠 있는 달 하나가.
내일은 영어학원이라도 등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떠나야지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떠나고 싶은 것인지, 어쩔 수 없이 떠나고자 마음먹은 것인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떠나고 싶은 것인지, 삶을 포기하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