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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땡땡 Apr 25. 2020

시간이 지나도 어려운 것

어쩌면 평생의 숙제

  내성적이고 낯가림 심한 성격인 나는 어릴 때부터 인간관계가 어려웠다. 덕분에 학창 시절 늘 새 학기 증후군에 시달리곤 했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시작이란 설렘보다는 두려움이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는 작은 학교에 다녔기에 학년이 올라가도 어려움이 없었지만 중학교부터 새 학기는 나에게 있어서 너무 두려운 것이었다. 특히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에서 시내권의 규모가 있는 학교로 바뀐 것이 나에겐 너무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어려웠던 나는 입학하고 한동안 학교에서 반 아이들과 말을 섞은 것이 열 번 될까 말까 할 정도였고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도 너무 힘들었다. 당시 우리 집은 부모님이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나에게는 학교도 집도 새로운 환경이 된 것이 꽤나 힘들었었다.

  정식으로 진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우울증이 있었던 것 같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자존감은 끝없이 낮아졌고 반 아이들이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로 끙끙 앓다 끝내 등교거부까지 하게 되었다. 결국 학교는 갔지만 한동안 매일을 눈물로 보냈었다. 다행히 그 후로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무사히 졸업을 했고 고등학교 때는 중학교 때 보단 약하게 지나갔다.

  학교에 다니다 보면 붙임성 좋고 반 전체와 두루두루 잘 지내는 아이들이 꼭 있는데 그런 아이들은 언제나 나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나는 반에 30명이 있다고 치면 그중에서 내가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아이들은 10명이 채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정말 친하고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아이들은 많아야 세네 명 정도에 불과했다. 나는 이런 내 성격이 싫었지만 성격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 나아지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지만 성인이 되고서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런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일본으로 유학을 결심했고 실제 다녀오기도 했다. 일본에 가기 전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었는데 학교, 학과 모두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입학할 때부터 반수 또는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에 대한 환상은 없었지만 대학의 술 문화나 똥 군기 등이 싫었고 결국 그나마 나아졌던 새 학기 증후군이 또 도지고 말았다.

  또다시 중학교 때처럼 사람들이 날 싫어한다고 생각했고 내가 가고 싶은 학교, 학과가 아니다 보니 어떻게 해서든 버티고 이겨내야지 하는 의지도 원동력도 없었다. 대학입시 당시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인 자연대학과 취업이 잘 된다는 공대 사이에서 취업을 선택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고 결국 난 자퇴 후 유학을 선택했다. 외국에 가면 인간관계가 더 어려워지겠지만 차라리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서 혼자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싸우고 내가 돈 벌어서 가겠다고 큰소리 뻥뻥 쳤기에 자퇴 후 알바에 전념했다. 워낙 낯가림이 심했던지라 편의점 알바도 힘들지 않을까 했었는데 똥줄이 타니 편의점 알바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유학자금을 모으려면 돈이 꽤나 필요했기에 편의점으론 모자랐고 패밀리 레스토랑 알바로 갈아타게 되었다. 낯가림 쟁이인 나로서는 장족의 발전이었고 이참에 이 빌어먹을 내성적인 성격 좀 고쳐보자 하는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패밀리 레스토랑 알바는 힘들긴 했지만 그 안에서의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어하는 내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 모두와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고 있었던 것이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약간의 부작용으로 술자리를 엄청 갖게 되었다. 대학에서의 선배들과의 불편한 술자리가 아닌 친한 사람들과의 즐거운 술자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처음으로 모두와 어울리다 보니 그런 자리를 빠지면 이 모든 게 없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도 있었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내 인생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신 시기였다.(아마 앞으로도 그때보다 많이 마실 일은 없을 듯)

  그렇게 돈을 모아 일본으로 떠났고 한국인 셰어하우스에서 살았던 나는 그곳 사람들과 그럭저럭 어울리며 나름대로 적응을 해나갔다. 그러나 한국에서 같이 아르바이트하던 친구들은 서서히 멀어졌고 내가 먼저 연락을 해도 잘 이어지지가 않았다. 나에겐 그들이 둘도 없는 추억이었지만 그들에겐 아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또 한 번 좌절했다. 그러다 일본에서의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등 여러모로 마음고생을 하던 어느 날 나는 마음의 문을 닫고 인간관계를 포기하고 말았다. 지금 있는 사람들만 잘 챙기고 더 이상의 인간관계는 맺지 않겠다는 쓸데없는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런 결심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전문학교(한국으로 치면 전문대학)에 진학했고 나는 먼저 다가오는 사람들에게도 단답으로 일관하며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전에는 어울리고 싶어도 못 어울렸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고 힘들었지만 그때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귀찮았고 혼자 있는 것이 편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지고 관계를 유지해나가기 위해 하는 일들이 다 귀찮고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렇게 전문학교 2년 내내 그나마 조금 말도 섞고 가깝게 지낸 한두 명 외에는 아무하고도 친해지지 않았고 자랑은 아니지만 같은 과 사람들 이름도 두세 명밖에 모른 채로 졸업을 했다. 그렇게 사회성이 한참 떨어진 상태로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와서는 나의 몇 없는 학창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며 취업준비를 했었는데 나 스스로도 내가 사회성이 떨어진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것을 굳이 고치고 싶지가 않았다. 내성적+낯가리는 성격은 취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그동안의 경험 때문인지 나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어린 시절보다는 낯을 덜 가리게 된 점이었다. 그 덕에 어찌어찌 회사에 들어갔지만 또래가 거의 없고 대부분 10살 이상 차이나는 상사들과 지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내가 회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이고 월급만 축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늘 무거웠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회 초년생이 겪는 문제겠지만 나는 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남들은 다 참고 버티는데 왜 난 그렇지 못할까 하고 또다시 자존감이 바닥 치는 시기가 계속되었다.

  그러다 어떠한 계기로 다시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람들과 어울려보기로 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마음과 다시 혼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충돌할 때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는데 바로 코로나 사태다. 나는 현재 교육계통에 종사하고 있어서 이 시국이 된 후로 직장을 쉬며 거의 집만 지키고 있는데 본의 아니게 사람들과의 교류가 끊기자 다시 인간관계를 포기했던 시절로 돌아가고픈 욕망(?)이 올라오고 있다. 연락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성격인지라 필요한 일 외에 먼저 연락을 잘하지 않는 나로서는 어떤 의미에서 고립되기 딱 좋은 환경이 된 것이다. 혼자일 때와 여럿일 때의 장단점 중 혼자일 때의 장점에 더 메리트를 느끼는 나로선 이 시국이 된 후로 다시 혼자로 돌아가고 싶다는 유혹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

  이런 내적 갈등이 계속되는 요즘 새삼 인간관계가 어렵다고 다시 한번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지금의 이 생각, 갈등이 생기는 것은 내가 인간관계에 있어서 과도기에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은 아마도 평생의 숙제일 듯싶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했던 내가 앞으로는 전처럼 인간관계를 아예 끊어버려야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이 아현명하게 극복해 나가기를 바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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