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학엄마 Oct 04. 2020

산책
- 크론병과 살아가기

딸의 크론병 이야기 7

  “먹는 것을 애기처럼 먹어서 그러나? 우리 민지는 사춘기가 아니라 점점 애기가 되는 것 같아.” 아프기 전에도 그렇게 심하게 사춘기로 엄마와 부딪힌 적은 없긴 했지만 아픈 후로 점점 어려지는 것 같다. 남들은 사춘기여서 엄마가 간섭하는 걸 싫어하는 시기인데 아기처럼 나의 손이 필요한 사춘기 딸을 키우는 것도 나쁘진 않다. 시도 때도 없이 엄마만 보면 안아 달라, 발마사지 해 달라, 맛있는 것 해 달라고 하는 것 외에도 한 가지 더. 놀이터.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나선 민지는 산책을 하다 놀이터만 보이면 ‘놀이터 가보자’를 외친다. 마치 아기들이 나가면 ‘놀이터’를 외치듯이.


  몸이 힘드니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만 있게 되고 그러다 보니 배가 고프지 않고 배가 고프지 않으니 먹는 양이 줄어들었다. 면역조절제 영향으로 입맛이 돌지 않으니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크론병 초기에 39킬로그램까지 빠졌던 몸무게가 치료를 하면서 45킬로그램까지 늘었었는데 여름을 지나면서 41킬로그램까지 빠져버렸다. 그나마 온라인 수업을 하는 동안은 집에만 있으니 에너지 소모가 별로 없으니 괜찮았지만 등교하는 주간이 되자 등교하기 전날부터 컨디션이 다운되기 시작했다. 크론병 환우들은 설사가 심하거나 복통이 심하면 일단 먹는 것부터 줄이거나 금식을 한다. 민지도 설사가 심하거나 복통이 와서 배가 불편하면 먹는 것부터 줄이다 보니 몸에 힘이 없어 영양 수액을 맞아보기로 했다. 지난주 월요일 하교 후 ‘비타민 마늘 주사’를 맞았다. 수액을 맞고 돌아와서 몸에서 마늘 냄새가 난다고 투덜대기는 했지만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 그러면서 스스로 다짐한 것이 매일 산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파란 가을 하늘, 햇살은 강하지만 여름 햇살처럼 따갑지 않은 따스하고 기분 좋은 햇살을 맞으며 동네를 산책하기 시작한다. 우리 동네는 1단지부터 4단지까지 구름다리로 쭉 연결되어 있는 산책로가 잘 갖추어져 있다. 이제는 지은 지 10년 차가 되었지만 놀이터들은 아기자기하고 잘 관리가 되어 있다. 단지마다 최소 3~4 군데의 놀이터들이 있는데 오늘은 3단지 놀이터 탐방에 나섰다. 처음 들른 놀이터는 축구장 옆에 있는 놀이터, 미끄럼틀과 서서 타는 시소가 있었다. 마치 널뛰기하는 것과 비슷한데 양쪽에 손잡이가 있어서 옆에서 누가 잡아주지 않아도 뛸 수 있는 널뛰기와 같았다. 노란색의 서서 타는 시소에 민지가 먼저 올라가고 내가 올라갔다. 몸무게 차이가 많이 나니 시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좀 더 세게 발을 굴러야 했다. 나는 세게 발을 구르고 민지는 몸무게를 최대한 실어 발을 눌러냈다. 


  그다음 탐방한 놀이터에는 민지의 최애 놀이기구인 그네가 있는 놀이터. 집 바로 앞에 있는 놀이터에는 그네가 없어서 어릴 때부터 항상 아쉬워했었다. TV를 보다가 어느 연예인의 집에 아기들 용 그네를 보고도 부러워하기에 네 방문에 그네 설치해 줄까? 하고 놀리기도 했을 정도로 그네를 좋아한다. 높고 파란 하늘 덕분에 그네를 신나게 타기에 안성맞춤인 날이었다. 민지 덕분에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간만에 그네를 신나게 탔다. 그다음에 간 놀이터에도 그네가 있었는데 이 놀이터는 처음 와 본 곳이었다. 민지는 친구들이랑 옛날에 자전거 타고 몇 번 와 본 적이 있다고 하며 나를 데리고 갔는데 그곳엔 특이한 그네가 있었다. 커다란 타이어에 가운데에 뻥 뚫린 부분은 아이들이 앉을 수 있도록 천과 철로 된 고리로 만들어져 있었다. 어릴 때 두 개의 그네에 각자 탄 후 다리로 두 그네를 연결해서 타던 ‘바이킹 그네’가 생각이 났다. 민지에게 바이킹 그네를 이야기해 주었더니 자기도 그렇게 놀았다며 반가워했다. 세월은 많이 흘러도 노는 방법은 비슷하다니 놀라웠다.


  마지막으로 놀이터로 오는 길에 가보고 싶다고 했던 갈래길로 가 보았더니 단지에 사는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 공간이 나왔다. 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는 가운데에 지붕이 있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 한국식 정자는 아닌 서양식 정자에 예쁜 의자도 있었다. 정자에 앉아 있으면 주변에 산과 심어놓은 꽃들만 보고 있어도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질 것 같은 곳이었다. 십 년을 살면서도 처음 본 곳이었다. 산책 중에 발견한 보물이다.


  이렇게 걷고 놀이 기구를 타고 하다 보니 아침밥이 소화가 다 되어 슬슬 배가 고파진다. 민지도 배가 고프다는 반가운 말을 했다. 좀처럼 나오지 않고 집에만 있을 때는 생존을 위해서 먹었다면 오늘은 진짜 배가 고파서 음식을 찾았다. 아몬드로 만든 우유를 사달라고 했다. 우유를 좋아하던 민지는 크론병이 발병한 이후로 우유를 먹지 못했었다. 크론병 환우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유당불내증’이 있는 경우가 많다. 유당불내증은 소장에서 우유에 포함된 유당을 제대로 분해하지 못해 설사나 복통을 일으키는 증상을 말한다. 보통 장염을 앓은 후나 선천적으로 유당 분해 효소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신랑도 우유를 먹으면 배가 자주 아파서 우유를 먹지 않는데 민지도 비슷한 경우인 듯하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집 앞 편의점에서 민지의 아몬드 우유와 엄마가 먹으면서 민지가 냄새 맡고 싶어 하는 커피 우유, 승현이가 먹을 초코우유를 사서 들어왔다. 아몬드 우유는 혹시 몰라 반만 먹어봤는데 일단 맛은 합격. 먹고 배가 아프거나 설사를 하지 않았으니 장에서도 합격.


  놀이터 산책이 너무 재미있다며 내일도 가겠다고 했다. 내일은 조금 더 욕심을 내서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는 9시 이전에 산책을 다녀와 보겠다고 한다. 과연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내일은 또 동네에 숨어있는 보물 같은 장소를 어디에서 찾아낼지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 식사 준비를 해야겠다. 가을 산책이 크론병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주길. 민지와 엄마의 소소한 추억이 또 하나 쌓여가길.

매거진의 이전글 발마사지 - 크론병과 살아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