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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학엄마 Jan 25. 2021

야채밥
-크론병과 살아가기

딸의 크론병 이야기 16

  12월 말에 내시경, MRI 검사로 고생하고 디피실 균 때문에 먹은 항생제 부작용으로  고생했었다. 다행히 크리스마스에 응급실 다녀온 후 하루 이틀 만에 컨디션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10월부터 먹기 시작했던 비타민 영양제들(비타민C, B, D, 코큐텐 등등 항산화 영양제)이 몸에 잘 맞았는지 대변 검사 수치나 피검사 수치들은 좋지 않았지만 평상시 컨디션은 나날이 좋아져갔다. 별로 춥지 않던 가을에도 추워서 침대에는 온열 매트를 깔아줬고 두꺼운 잠옷과 수면 양말을 꼭 챙겨 신어야 했던 민지가 한겨울에도 덥다고 자기 방 창문을 열기도 하고 집안 곳곳을 신나서 뛰어다니기도 했다. 


  1월 초, 올해 첫 진료 때 2주 후에 대변 검사로 칼프로텍틴 수치를 확인해 보고 아마도 레미케이드 주사제로 약을 바꿀 것 같다고 의사선생님께서 이야기 하셨다. 이제는 주사제 치료로 가야하는구나 하고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다. 2주 동안 엘리멘탈 경장영양제만 먹여서 수치를 확 내려가도록 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거의 두 달을 흰죽에 엘리멘탈, 엔커버만 먹은 민지에게 할 짓이 아닌 것 같았다. 


  민지는 크론병 진단 전에도 야채를 참 좋아했었다. 양파, 브로콜리, 버섯, 당근, 고구마 등등 거의 모든 야채를 좋아했다. 하지만 크론병 진단 이후에 양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주지 못했었다. 장에 있는 염증에 식이섬유가 가득한 음식들은 부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식이섬유가 많지 않은 음식 위주로 먹이다 보니 계란, 두부, 살코기, 생선 종류만 주로 먹였었다. 하지만 야채를 언제까지 제한할 수는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장에 부담이 덜 가는 선에서 야채를 먹일 수 있을까? 


  버섯을 좋아하는 우리 식구들을 위해 버섯밥을 자주 해 주곤 했었는데 밥을 지을 때 각종 야채를 잘 다져서 넣고 압력솥에서 밥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무리가 없을 것 같은 야채인 양파, 버섯, 청경채와 브로콜리를 분쇄기에 넣고 아주 잘게 갈고 씻어놓은 쌀 위에 올려서 압력솥으로 밥을 했다. 양파나 버섯만 넣고 버섯밥은 해 봤지만 브로콜리를 넣은 것은 처음이라 밥이 괜찮을지 살짝 걱정이 되었다. 압력솥에서 김이 다 빠지고 드디어 뚜껑을 열어보았다. 밥의 색깔은 신선한 야채의 색깔은 아니고 조금 우중충한 그런 색깔이었다. 워낙 잘게 갈아버려서인지 이게 버섯인지 브로콜리인지 구분도 안 되고. 하지만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달래간장에 밥을 비벼서 먹으니 간만에 야채를 먹은 민지가 정말 맛있다고 저녁에 또 해달라고 했다. 저녁에 또 해달라는 말은 민지 입맛에도 합격이라는 뜻. 그 날 저녁 온갖 야채를 또 분쇄기에 열심히 갈아 이번엔 새우도 잘게 썰어 넣고 밥을 했다. 새우를 넣은 야채밥은 아빠와 민지 동생에게도 합격점수를 받았다. 


  안 먹던 야채를 먹고 혹시라도 소화가 안 되고 배가 불편할까봐 불안했지만 다행히 소화도 잘 되었고 변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처음엔 분쇄기에 아주 잘게 갈은 야채로 밥을 지었지만 나중에는 칼로 잘게 다져서 야채밥을 지었다. 넣는 야채도 좀 더 다양하게 케일, 비트, 고구마도 넣고 새우 대신 닭고기, 돼지고기 기름 없는 부위, 전복 잘게 다닌 것을 넣기도 했다. 


  그렇게 야채와의 맛있는 동행을 하며 2주가 지나갔다. 변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 원래는 엄마만 진료 보러 가서 결과 듣고 다음 치료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날이라 민지는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인데도 같이 가고 싶다고 했다. 피검사 결과나 대변 검사결과는 마치 시험을 보고 시험 점수를 받으러 가는 기분이 든다. 병원 가기 전 날은 내일 검사결과가 나쁘면 어쩌지 하는 걱정으로 잠을 설치게 된다. 잠이 들었다가도 곧 깨고 쉽게 잠이 들지 못해 누운 채 스마트폰에서 크론병 관련 카페에도 들어갔다 검색창에서 크론병에 좋은 음식 등등을 검색하여 읽다 보니 아침이 밝아온다.


  아침 일찍 진료 예약이 되어 있어서 일찍 서둘러 병원에 도착했다. 민지 앞에서는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마음은 콩닥콩닥 떨렸다. 의사 선생님 방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할 때가 가장 떨린다. 선생님 얼굴을 보자마자 인사도 하지 않고 수치가 어때요? 하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마음을 차분히 하고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선생님 얼굴이 밝다. “민지 잘 지냈나봐. 수치가 좋아졌네요?” 12월 중순에 칼프로텍틴 수치가 2900이었다. 그 전에 10월 말 수치가 4000이 넘었었다. 12월까지 두 달여 간 많이 내리긴 했지만 여전히 높은 수치였다. 주사 치료로 넘어가야 하나를 고민했었는데 한 달이 지난 시점에 1800으로 또 내려갔다. 선생님께서는 작년 4월에 처음 했던 치료인 스테로이드 치료를 한 번 더 해보자고 하셨다. 지금처럼 잘 관리하면서 스테로이드로 관해 유도해 보자고.

 

  시험 보고 100점 맞은 기분. 아니 그 기분 보다 더 좋은 기분이었다. 스테로이드를 두 달 동안 먹어야 하고 아직은 먹거리에 제약이 많지만 각종 야채, 해산물, 고기도 먹을 수 있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다양해지니 민지가 느끼는 스트레스도 훨씬 줄어들었다. 버섯, 양파, 당근, 비트, 청경채 등을 다진 후 밀가루 대신 아몬드 가루 두 숟가락과 계란을 섞어서 들기름에 구워서 야채전을 해 줬다. 밀가루 대신 넣은 아몬드 가루가 고소해서였는지 정말 맛있다며 간식으로 또 해달라고 했다. 버섯으로 일본식 덧밥인 돈부리를 했는데 물의 양이 많아서 계란국처럼 되긴 했지만 얇게 저민 버섯이 야들야들 부드러워서 맛있다고 했다. 오늘은 쌀로 만든 소면으로 잔치국수를 해주기로 했다. 예전에는 야채를 사두기는 했어도 한 번 조리하고 냉장고에 묵혀두다 상해서 버릴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브로콜리가 떨어지지 않게 이틀에 한 번꼴로 집 앞 야채가게에 가게 된다. 내일은 또 야채를 이용한 어떤 요리를 할까 고민하는 것도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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