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크론병 이야기 17
크론병 만이 아니라 만성 질병 환우와 환우 가족들은 마음을 돌보는 일이 필요하다. 각자 자신의 방법으로 마음을 잡지 못하면 길고 긴 싸움에서 삶을 살아내기가 쉽지 않으니. 민지와 나, 우리 가족은 힘든 시기를 함께 드라마를 보는 것으로 이겨냈다. 2020년은 민지가 크론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전 세계가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싸움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다른 해에 비해 등교하는 날도 줄어들었고 예년 같으면 중간고사, 기말고사 총 4번의 시험을 치러야 했던 것이 각 학기마다 기말고사만 치렀다. 시험이 줄어드니 공부해야 하는 양도 줄어 시간적인 여유는 있던 한 해였다. 온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드라마나 영화를 볼 시간이 생겼다. 민지는 컨디션이 좋을 때는 공부도 하고 책도 읽었지만 컨디션이 안 좋은 날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몸이 힘들면 잠을 자곤 했지만 잠을 자는 것도 한계가 있어 어느 정도 잠을 자고 나면 심심해했다. 그럴 때면 드라마를 한 편씩 봤다.
드라마는 넷플릭스에서 주로 종영한 드라마들을 봤다. 하루에 한 편씩 보기도 했지만 컨디션이 안 좋거나 공부하기 싫은 날은 3~4편씩 몰아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종영한 드라마들을 선택했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 <킹덤>, <미스터 선샤인>, <별에서 온 그대>, <시카고 타자기>, <빨간머리 앤>, <스위트 홈>, <경이로운 소문>까지. <킹덤>이나 <스위트 홈>처럼 좀비가 나오거나 무서운 드라마는 동생은 안 보고 (아니 못 보고) 나와 민지, 남편만 봤다. 특히 민지는 좀비가 나오는 드라마는 꼭 나랑 보려고 했다. 좀비가 나올 때 마다 깜짝 깜짝 놀라는 엄마의 리액션이 있어야 더 재미있다나?
우리 집 울보 삼인방 (남편을 제외한 세 명)은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일이 아주 많았다. 미스터 선샤인 마지막 부분에 함안댁과 행랑아범이 다른 일행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가마에 고애신을 태운 척하고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일본군의 총살로 죽는 장면을 보며 우리 셋은 꺼이꺼이 소리 내며 울었다. 며칠 전 끝난 경이로운 소문 마지막 회에서 카운터 소문이 악귀를 물리치고 악귀에게 잡혀있던 부모님을 융에서 만나는 장면을 볼 때 나는 민지의 다리를 주물러주고 있었는데 눈물이 뚝뚝 민지의 다리까지 흘렀다. 눈물 흘리며 보는 동안은 서로의 얼굴은 쳐다보지 않는다. 드라마가 끝나면 흘렸던 눈물을 닦으며 “아, 잘 울었다.” 하며 그제야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음 짓는다.
눈물을 흘리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 졌다. 민지도 그랬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으나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겉으로는 괜찮다 웃으며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거의 1년째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대로 못 먹는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힘들어하는 딸을 옆에서 보며 하루하루를 살얼음판을 걷는 듯 살고 있는 나에게도. 묵묵히 딸을 응원해주는 신랑, 누나를 돌보느라 상대적으로 돌봄을 덜 받게 되는 동생도 나름의 스트레스가 있었을 터. 가족이 모두 모여 드라마를 함께 보는 시간은 온 가족의 힐링 타임이 되어 주었다.
작년 9월 말, 10월 초에 바닥으로 떨어졌던 몸 상태가 이제는 홈트레이닝도 한 시간씩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다. 식이 조절과 영양제 섭취, 바뀐 약으로 인해 좋아진 면도 있겠지만 스트레스를 함께 떨쳐낼 수 있었던 가족과 함께 본 드라마들은 민지의 마음을 더 단단하게 해주지 않았을까. 요즘 보고 있던 ‘경이로운 소문’이라는 드라마가 종영이 되어 “다음엔 뭐 볼까?”라고 물었더니 이제 고등학교 입학이 얼마 남지 않아서 드라마는 끊을 거라고 했다. “올해 5월에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 나온데.” 라고 했더니 중간고사 끝나면 몰아서 봐야겠다는 딸. 또 우리는 울면서 힐링을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