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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지 않는 계절이 남긴 것들

시절인연, 특정한 공기를 공유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by 그냥 하윤

얼마 전, 해외에 계신 신부님이 잠시 한국에 오셨다. 그 소식을 듣고 2년 전 성당 청년부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늘 주말마다 여전히 보는 얼굴들도 있었지만, 서로 다른 도시에 살아 예전처럼 불쑥 만나기 어려워진 사람들도 있었다. 종종 삶과 연애 상담을 나누던 친구 중 한 명은 어느새 결혼해 새 생명을 품었고, 또 다른 친구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니 다들 많이 변했다"는 말이 공중에 머물렀다. 그 순간, 변한 건 얼굴이 아니라 우리가 숨 쉬는 공기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 말이 '시절인연'이란 말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계절에만 유통되던 공기처럼 특정한 시기에만 곁에 머문다. 같은 얼굴이라도 다른 시기에 만났다면, 아마 전혀 다른 관계였을 것이다. 그때의 우리는 같은 속도로 숨을 쉬었고, 비슷한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 공기가 사라지면 우리의 모습도 서서히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예전엔 심심하면 만나서 마시고 웃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느라 모임이 뜸해졌다. 달라진 건 마음이 아니라 생활의 속도였다.


웃음과 바람이 뒤섞이던 여름날


만남의 배경을 들여다보면 늘 타이밍이 있다. 청년부에서 만난 인연뿐 아니라, 내 삶의 수많은 관계들이 그렇다. 같은 학교와 같은 직장, 같은 취향, 혹은 우연처럼 겹친 사건 하나. 수많은 조건이 겹쳐서 만들어낸 좁은 교차점에서 우리는 만났다.


내가 두 달 늦게 태어났더라면, 다른 반에 배정됐더라면, 그날 밤 내가 명동 카페에 가지 않았더라면?

가정법으로 펼쳐본 평행우주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모른 채 지나쳤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만남이 확률의 산물이지만,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고민을 안고, 비슷한 것에 끌려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어딘가에서 마주치게 될 테니.


모든 인연이 영원해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관계가 멀어지면 누군가의 잘못이거나, 내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관계는 특정 시기의 나에게만 유효하다. 그 시절의 상황에서만 가능했던 반응과 말투, 웃음의 타이밍이 있다. 시절이 바뀌면 그 조건도 변하고, 관계도 다른 모양을 띠거나 조용히 흩어진다.


2년 전의 여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


어쩌면 인연은 멀어질 때 찾아오는 아쉬움까지 포함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멀어지는 순간의 공백이야말로 그 관계가 한때 살아 있었음을 증명하니까. 지금은 연락이 뜸해졌지만 그때 나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 첫 직장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나누던 동료들, 짧게 스쳐갔지만 결정적인 순간을 함께한 사람들. 그들을 떠올리면 그 시절의 나도 함께 되살아난다.


그때 그 사람들과 나눈 대화와 함께 보낸 시간, 서로에게 준 영향이 모두 그 시절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됐다. 이제는 끝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 그 시절 그 만남이 내게 남긴 것들에 대한 감사가 먼저 떠오른다. 그들이 그때 내 옆에 있었다는 건, 분명 그 시절의 내가 필요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연의 가치는 지속 시간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시절만의 완결성에 있다. 각 시절의 인연들은 그 시절 안에서 이미 완성된 이야기였다.


가끔 그 시절의 공기가 스쳐온다. 오래전 우리가 앉았던 그 자리처럼, 맥주 거품 속에 묻힌 웃음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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