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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부끄럽고 싫은 당신에게

자기 존중은 스스로와의 화해에서 시작된다

by 그냥 하윤

지난 연휴는 오랜만에 맞은 공백의 시간이었다. 초여름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을 쉬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온 몇 년 동안은 이렇게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틈조차 없었다. 기계처럼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어느새 남은 건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뿐이었다.


파도가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문득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쫓기듯 살게 되었나 싶었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 뒤처지면 안 된다는 조바심이 켜켜이 쌓여 어느새 나를 숨 막히게 짓누르고 있었다. 바다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리듬을 유지하고 있는데, 나는 왜 그렇게 서둘러왔을까.


그러다 문득 과거의 나에게, 그리고 비슷한 자리에 있는 누군가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누군가는 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자존감'이라는 말의 피로


이제는 너무 흔하게 소비되어 버린 단어가 있다. 바로 '자존감'. SNS에서도, 유튜브에서도, 책 제목에서도 만난다. 남발되다 보니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단어는 어딘가 어긋나게 쓰일 때가 많다. ‘자존감’과 ‘자존심’을 혼동하기도 하고, ‘자기애’와 ‘자존감’을 동일시하는 시선도 흔하다. 자기 자신을 과장되게 특별하다고 믿는 태도를 건강한 자존감인 양 착각하는 경우다.


여기에 성장 환경까지 단순화해 덧붙이면서, 사랑받고 자란 사람은 자존감이 높다는 식의 일차원적인 프레임이 소비되기도 한다. 물론 환경이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결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얄팍한 도식화에 늘 거리를 두게 된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의 줄임말이다.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감각이다. 좋은 면뿐 아니라 부족하고 서툰 모습까지도.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고, 무엇을 이루었을 때만 인정하지 않고. 조건 없이 나를 인정해 주는 감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나를 존중하는 동시에 타인을 존중하는 감각으로 이어진다. 결국 자기 존중은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고,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다.



거북이 등껍질을 벗는 일


건강한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꾸며놓은 모습 말고, 민낯 그대로. 못난 부분까지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일이다.


예전의 나는 '거북이 등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자존감이 낮으니 자존심으로 덮어두는 방식이었다. 속은 연약한데, 드러내 보이긴 두려운. 하지만 등껍질 속에 숨어있는 한, 결국 성장할 수 없다. 진짜로 강해지려면 연약한 내면을 드러내고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모래 위에서는 성을 지을 수 없다. 반석을 다지려면 바닥을 다 뒤집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지면서, 내 마음이 왜 이렇게 바닥을 치게 됐는지를 하나씩 들여다보아야 한다.


나는 나의 처지, 흔들리는 마음, 우울한 기분,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불안감. 그런 나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려고 했다. ‘그래, 나는 한심한 인간이었구나.’ 하는 것을 억지로 부정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건 자기 비하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수용일 뿐이다.



감정의 주인이 되는 것


몇 년 전 만났던 상담사는 내게 중요한 통찰을 주었다.

“감정을 외부에 맡기는 순간, 주체성은 희미해집니다.”

자신의 감정을 방치하고 누군가 해결해 주길 바라는 의존적 태도는 결국 자존감을 더 모호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내 감정이 힘든 것도, 누군가가 다독여주길 바라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결국 내 감정은 내가 들여다보고 풀어야 한다. 외부가 잠시 위로해 줄 수는 있어도, 해결까지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내 감정을 다루는 주도권을 타인에게 맡길 때마다 정신은 점점 흔들리고, 존재의 중심이 희미해진다.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함이 밀려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내 기분이 이렇게 가라앉아 있을까?”

그 질문을 반복하다 보면 실타래가 조금씩 풀린다. 나를 힘들게 만든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기도 한다. 감정을 삭이기만 할 때보다 훨씬 덜 무너진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는 연습이 쌓일수록, 감정의 파도에도 조금은 덜 흔들리게 된다.


무너진 자아존중감을 회복하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이다. 밑도 끝도 없이 비논리적인 나를 논리적인 내가 굴복시키고, 다시 끌어올리는 과정이다. 어쩌면 스스로와의 화해에 가깝다. 그렇게 주도권을 다시 찾아갈 때, 마침내 나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게 된다.



조금씩 단단해지는 확신


자존감이 회복되기 시작하면, 조심스러운 확신이 싹튼다.

처음에는 “나는 이유 없이 남들을 무시하지 않으니까, 남들에게 무시당할 이유가 없어”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보았다. 구구절절한 이유를 붙여가며 납득시키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나는 이유 없이 남들을 무시하지 않으니까’ 하는 구차한 전제를 떼어버리고도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었다.


굳이 앞에 이런 자질구레한 전제를 붙이는 이유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나 자신에게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설득하는데 필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 짧은 문장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렇게 조금씩 단단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납득한 다음에는, 아주 사소한 성취라도 스스로에게 허락해주기로 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시도해본다거나, 짧은 글을 완성하는 것처럼 내 안에서 스스로 박수 쳐줄 수 있는 작은 계기를 만들어줬다. 별것 아닌 작은 경험들이 쌓일수록, 내 안의 확신은 조금씩 자리 잡아갔다.


자존감이란 결국 존재 자체를 수용하는 힘이지만, 자신감은 행동에서 얻어지는 힘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면서도, 동시에 작게나마 성취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보려 했다. 두 가지가 함께 쌓일 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처음에는 이 성취감마저도 어쩌다 운이 따라준 것 같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이 뒤따랐다. 하지만 같은 경험이 반복될수록, 그것이 내 능력이고 내 몫이라는 감각이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고 느슨한 확신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흔들림을 조금씩 덜어냈다.


그렇게 반복하며 쌓인 작은 확신들은 어느새 내 삶을 조금 다른 결로 바꾸어 놓았다.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간다


뻔한 말이지만 늘 정확한 진실이 있다. 시간은 결국 흐른다. 아물지 않을 것 같던 상처도 언젠가는 흔적이 되고, 서툴렀던 고백조차 언젠가는 담담해진다.


과거 20대의 나는 스스로를 붙잡지 못해 오랜 시간을 헤맸다. 항우울제와 함께 살던 시간, 미성숙으로 소중한 사람을 아프게 했던 기억들. 부끄럽고 때로는 아팠지만,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과거는 그렇게 스며들어 양분이 된다. 바닥처럼 느껴졌던 순간도 지나고 보면, 모두 내가 걸어온 풍경의 일부다.


조금씩 단단해지고, 조금씩 나를 아끼게 되는 시간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오늘도, 그렇게 흘러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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