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찾고 있는 건 삶을 버티는 작은 장치
오래된 질문
주말은 내게 유일한 휴식이다. 잦은 야근과 스트레스 이후 찾아온 주말은 내게 마치 가뭄에 온 단비 같다. 이런 날은 마음이 붕 뜨는 느낌이라 현실감 마저 없다. 그리고 그 붕 뜬 기분을 뒤로하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현실은 때론 혹독하고 괴롭다. 하지만 나는 그 현실을 회피할 수만은 없다. 일종의 책임감 때문에.
언제까지나 철없이 낭만을 꿈꿀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괴로운 현실을 낭만적이게, 최대한 즐겁게 살고자 노력했다. 결국 이 각박한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 모든 오감과 이성이었으므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른 관점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수용이 인간의 한계이며, 인간의 특권이다. 일종의 자기기만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리가 정작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기기만의 기준은 불명료하다. 나는 잠시 인간적 한계에 몸을 기대어 위안을 얻는다. '우리가 보고, 우리가 듣고, 우리가 느끼고, 그리고 결국 우리가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이게 우리의 운명이고, 겸손일지도 모른다. 불가지론적인 그 무엇에 의문을 품지 않고 그저 현실에 주어지는 대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좀 더 융통성 있고, 자기에게 이롭게 변이 시킨 채로 살아가는 것.
현실이 무엇인지, 꿈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가늠하기 어렵다면, 결국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하나를 기준으로 세우고 될 대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20대의 끝자락에 와있지만, 앞으로 살아온 날들보다 더 긴긴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나. 나는 지금 살아감에 있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지..?
사람들은 한때 나에게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못해 비관적이라고 했고, 한때는 꿈이 너무 많은 지나친 이상주의자라 말했다. 그 누구는 나를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같다고 말했고, 그 다른 누구는 나를 애늙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결국 그들의 잣대였으며 그 기준은 너무나도 가변적이었고,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사실 내가 말하는 것조차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물론 내가 말하는 순간만큼은 나는 내 말에 확실성을 갖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비록 내가 그전에 확신을 갖고 말한 것이었을지라도 다시 확언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1년 전 말했던 것에 대하여, 혹은 1달 전, 1일 전, 1시간 전 말했던 것들에 대하여 그 시간이 거듭될수록 확실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세상은 흐르고, 만물은 흐르고, 생각도 흐르고, 트렌드도 바뀌고, 사람도 바뀐다. 모든 것이 바뀐다. 그중에 나 자신만이 바뀌지 않을 수는 없다.
물론 나는 어떠한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가장 핵심적인 그 무엇. -진정성-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그 밖의 수많은 현상들은 끊임없이 바뀔 것임에 틀림없다.
30대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의 응답
28살의 나야, 네가 남긴 문장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어. 그때 너는 꽤 진지했고, 스스로를 철학적으로 포장하려는 욕심도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갈증이 있었지. 현실과 낭만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흔들리던 시절, 어떻게든 답을 찾고 싶었던 갈증.
난 이제 네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어. 그런데 웃기게도, 여전히 확실한 답은 없어. 다만 차이가 있다면, 답이 없다는 사실을 조금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됐다는 거야. 예전에는 답을 못 찾으면 불안했는데, 지금은 답을 못 찾는 상태 자체가 내 삶의 일부라고 인정하게 된 거지.
너는 현실을 낭만적으로 살고 싶다고 했지. 그 말은 지금의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해. 다만 낭만의 자리가 조금 달라졌어. 예전엔 낭만이 현실을 덮는 포장지 같았다면, 지금은 오히려 현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장치 같은 느낌이랄까? 힘들 때 나를 붙잡아주는 건 큰 비전이나 철학이 아니라, 순간순간 기댈 수 있는 작은 낭만들이라는 걸 배웠거든. 예를 들면, 저녁에 일을 마치고 나서 강아지랑 산책하는 그 삼십 분, 좋아하는 노래 하나를 반복해서 듣는 그 짧은 시간, 매일 매일 챙겨보는 야구 경기. 그런 게 없었다면 현실을 버티는 일은 훨씬 더 건조했을 거야.
그리고 네가 집착처럼 언급했던 '진정성'. 그건 지금도 내가 붙잡고 있는 중요한 기준이긴 해. 하지만 그때는 그걸 '내 안에서 굳건히 지키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지금은 조금 다르게 느끼고 있어. 진정성은 혼자만의 결심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 확인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거든. 누군가와 부딪히고, 오해도 겪고, 실망도 주고받으면서도 끝내 잃지 않으려 애쓰는 태도. 그게 지금 내가 말하는 진정성이야.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흐르더라. 35번째 생일을 보낸 게 벌써 지난 일이 되었고, 이제는 정말로 30이라는 숫자보다 40이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어. 그 사실만으로도 가끔은 마음이 내려앉곤 해. 나는 아직도 서툰 게 많은데,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성숙해지거나 단단해지지는 않더라고.
그래도 하나는 확실해.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게 부끄럽지 않다는 거야. 28살의 나는 "30대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고 물었어. 그리고 지금의 나는 너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있어. 그리고 언젠가 40대의 나는 또 다른 목소리로 답을 이어가겠지. 아마도 여전히 같은 질문을 붙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실패가 아니라, 삶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일 거야. 변하지 않는 질문 위에서 변하는 답을 이어가는 것. 그게 아마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내 진정성의 또 다른 얼굴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