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인 것과 외로운 건 다르다는 깨달음
오래된 질문
<疏通의 不在>
누군가로부터 내 삶을 이해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여긴 순간 나의 환상은 그 자리에서 유리조각처럼 부서져 버렸다. 그 헛된 기대 속에 소통할 수 없는 무거운 벽을 절감했다. 인간 본연의 조건에 따르면 완전한 소통은 불가하다.
서로 의미 없이 던져지는 말들은 각자의 말에 튕겨 나와 허공으로 사라질 뿐이다. 그것은 의식에조차 남지 않는다. 기억과 인식, 이성적 판단의 고려대상이 될 리 만무하다. 그저 말은 '말할 필요' 그 자체에 의해 존재한다. 수단이 목적이 되고, 주객이 전도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결국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간단한 형식치레 아니면 감정의 배설, 혹은 무의미한 말들의 나열일 뿐이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이해집단 간에 더 빈번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토록 중요한 자신의 이해득실이 달린 일인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내가 이해받기를 바라고, 최소한 이해는 아니더라도 내 얘기를 들어주기 바랐던 것은 나의 큰 오해와 불찰이었다. 물론 막연한 희망은 그 와중에도 좀 더 세심하게 경청하려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희망은 비참하고 때로는 민망스럽기까지 하다. 너무도 이상주의적이고, 때론 이 사치스러운 기대와 희망을, 이 희박하고 절박한 가능성 속에 그것을 바란다는 것이 과연 합당하기나 한 걸까 하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질 뿐이다.
지금의 응답
28살의 나야. 그때 너 많이 피곤했구나. 야근이 너무 많아서 그랬나? 아니면 다이어트로 당분이 부족했던 걸까? 어쨌든 글 속의 절실함은 지금 봐도 선명하다. 다만 그 절실함이 때로는 결론을 성급하게 끌고 갔던 것도 사실이야.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단정은, 그 시절 네가 느끼던 고립을 더 크게 만들었지. 완벽하게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겠지만,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애쓴 사람들은 분명 있었잖아. 네가 그걸 못 본 건 아니었을 텐데, 아마 그 '조금'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무시했던 건 아닐까.
그 시절의 너는 자꾸 완전한 소통을 기준으로 삼았어. 100% 아니면 0%였지. 그러니 모든 게 불가능해 보였던 거야. 이제야 조금 감이 오는 것 같아. 사람들 사이엔 원래 좀 어긋남이 있고, 때로는 그 어긋남이 꼭 잘못은 아니라는 거. 말이 전달되는 게 절반 정도만 성공해도 사실 꽤 놀라운 일이라는 걸 말이야.
네가 쓴, 말은 말할 필요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말. 그건 지금 봐도 날카로운 통찰이야. 다만 헛된 말이라도 우리는 여전히 말할 수밖에 없어. 이해를 전제로 하기보다는, 그냥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대화는 늘 어설프지만 동시에 관계를 이어가는 거의 유일한 방식이기도 하지.
요즘은 그냥 누군가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순간이 오면 그걸 꽤 특별하게 느껴. 이해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가끔은 그저 말이 허공으로 안 사라지고 있다는 감각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더라고. 여전히 인간관계는 피곤하고, 대화는 미묘하고, 오해는 예상보다 자주 생겨. 하지만 그럼에도 말을 계속한다는 건 이 관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고, 그 시도가 늘 실패하는 건 아니었잖아.
아직도 완전한 소통은 못 믿겠어. 가끔은 아예 입 다물고 싶어지기도 하지. 근데 이상하게도, 결국 또 누군가한테 말하게 되더라. 왜냐면 불완전한 소통이라도 그게 나를 완전히 고립시키지는 않는다는 걸 배웠거든. 그리고 때로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 예상치 못한 따뜻함을 발견하기도 해.
지금 생각해 보니 네가 그토록 갈구했던 건 결국 외로움을 달래줄 무언가였던 것 같아. 근데 안타깝게도, 그 외로움은 아직도 나랑 같이 살고 있어. 월세도 안 내고, 방 한편에서 말없이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룸메이트처럼. 그렇지만 이제는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고 있어. 혼자인 것과 외로운 것이 같지 않다는 것도. 그리고 그 둘이 전혀 다른 얼굴로 찾아올 때가 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