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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면 틀어지고, 숨기면 이루어진다

침묵이 지켜낸 나의 작은 주술

by 그냥 하윤

살다 보면 누구나 우연처럼 겹쳐 오는 일들을 경험한다. "오늘은 한가하네"라는 말이 입 밖에 나가는 순간, 갑자기 쏟아지는 급한 업무. 직장인이라면 한두 번쯤 겪어봤을 법한 징크스다. 나는 이 작은 패턴을 넘어선, 더 집요하고 반복적인 경우들을 겪으며 살아왔다. 그 결과 내겐 묘한 믿음이 생겼다. 무언가를 말로 내뱉는 순간 그것은 반드시 틀어진다는 것이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일은 프리랜서로 전향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두 달간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내가 맡아야 할 비중은 꽤 컸다. 웹사이트의 디자인부터 프론트엔드 형태까지, 사실상 초반 구조를 잡는 일이라 무게감이 남달랐다. 견적을 들었을 때는 더욱 놀라웠다. 재직 시절 한 달치 월급의 3.5배를 상회하는 액수였다. 짐짓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이제야 길이 열리는 걸까'라는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가족들과 식사하면서 그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그게 화근이었는지 프로젝트는 연기되었고, 한 달 뒤 담당자가 다시 연락해왔다. 이번에는 "저희가 말씀드렸던 견적이 사실 우리 대표의 컨펌을 받지 못했다"며, 혹시 100만 원 정도만 낮출 수 있겠느냐는 황당한 요청을 덧붙였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또다시 말이 꼬였구나.


이건 비단 일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대학 시절,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친한 친구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설레는 마음을 감추기 어려워 연애 상담처럼 툭 던진 고백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때마다 일이 꼬였다. 상대와 오해가 생겨 더 이상 가까워지지 못한다든가, 사소한 계기로 관계가 흐지부지 끝나버린다든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어쩌면 조금은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만 남았다.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나는 점점 말을 조심하게 됐다. 기쁨도, 기대도 쉽게 꺼내놓지 않게 되었다.


2023년, 내가 응원하는 팀이 한국 시리즈에 진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변 사람들이 들뜬 마음으로 '우승'이라는 단어를 꺼낼 때마다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 단어는 차라리 입에 올리지 않는 게 낫다고. 말하는 순간 그 기대가 공기 속으로 흩어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함께 웃고 떠드는 자리에서도 나는 끝내 '우승'이란 말을 삼켰다. 이제는 침묵이야말로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작은 주술이 되었다.


b6e519bb945437ce0d816ab20fded212.jpg 침묵은 늘 조금의 거리를 남겨둔다.


우연이라 여겼던 패턴이 몇 년, 몇 차례 반복되다 보면 더 이상 단순한 우연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나는 점차 학습했다. 말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의도와 기대를 바깥으로 흘려보내는 행위라는 것을. 말하는 순간 내 안의 에너지가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린다. 그것을 붙잡아 줄 울타리 없이 흩뿌려놓은 희망은 쉽게 깨지고, 종종 배반당한다. 그래서 나는 중요한 계획이나 바람을 점점 더 말하지 않게 되었다. 들뜬 마음을 숨기는 습관이 생겼고, 누군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때조차 조심스러워졌다.


물론 이 방식은 나를 답답하게 만들기도 한다. 때로는 혼자만의 비밀을 짊어진 채 살아가는 것 같아 외롭다. 말하지 못한 문장들이 속에 쌓이면 때때로 그 무게가 내 어깨를 눌렀다. 누군가와 나누면 조금은 가벼워질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조차 틀어질까 두려워 끝내 입을 다물곤 했다. 침묵은 나를 지켜주는 동시에 나를 고립시켰다. 기쁨을 말하지 못한 만큼, 슬픔도 털어놓지 못해 더 깊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됐다. 말은 물결이고, 침묵은 방파제라고. 파문은 누구도 제어할 수 없지만, 방파제는 최소한 나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흔히들 꿈은 말하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어떤 가능성이 현실로 확정되는 순간 말에 의해 촉발된다고 믿는 것. 하지만 내겐 정반대였다. 말은 가능성을 확정짓기보다는 흩어지게 했다. 말하지 않으면 이루어졌고, 말한 순간엔 멀어졌다.


어쩌면 세상에는 두 부류가 있는지도 모른다. 말해야 이뤄내는 사람과, 말하지 않아야 이뤄지는 사람. 나는 그 사이에서 후자에 가깝다. 나만의 방식이 절대적일 리는 없다. 다만 내 삶의 경험이 그렇게 나를 이끌었고, 나는 그 리듬에 맞춰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이루고 싶은 꿈일수록 입술 안쪽에만 간직한다. 말하지 않는다는 건 비밀을 쌓아두려는 게 아니라, 흩어지지 않게 지켜내려는 나만의 방식이다.


언젠가 이 방식이 불필요해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온다면, 말해도 무너지지 않는 순간이 온다면 그 또한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침묵 속에서 꿈을 오래 지켜내며 살아간다. 그 조심스러움이야말로 나를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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