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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만 모르겠을 때

여러 사람 속에서 나만 느꼈던 불편한 감정의 이유

by 그냥 하윤

사람을 잘 본다는 말이 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그런데 이것은 때때로 참 이상하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따져봐도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감정이 몰려올 때가 있다. 모두가 칭찬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나 혼자 이상하게 바라보게 되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때마다 내 직감이 객관적인 신호인지, 아니면 어쩌다 마음에 든 흠집 때문에 비뚤어진 편견인지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아는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럴 땐 그 사람이 결과적으로 이득을 보는지, 손해를 보는지를 보면 돼요. 사람의 본질은 결국 평판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둔 결과로 드러나게 되어 있거든요."


그는 덧붙여 말했다.


"평판이 좋다고 다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쁘다고 해서 다 나쁜 사람도 아니에요. 위선적인 사람도 있지만 위악적인 사람도 있어요.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결정적인 순간에 누군가를 돕기도 하죠."


듣기에 따라 냉정하고 씁쓸한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조금씩 계산의 저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말은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잘 보여야 하는 사람'에게는 호인의 가면을 쓰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뜻이었다. 친절이나 선의마저도 철저히 계산된 행동일 수 있다는 얘기다.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내 마음속 그 혼란스러운 감정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감정은 내가 상대방에게 어떤 존재로 분류되었는지 본능적으로 눈치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보니 유감스럽게도 내 직감은 맞았다. 내가 느꼈던 그 막연한 불편함은, 결국 내가 그들에게 ‘잘 보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군’에 속했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감각이었다.





감정은 때로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도 신호를 보내온다. 어쩌면 내 본능이 그 사람과의 관계 속 내 위치를 미리 감지하고, 경고를 보내왔던 건지도 모른다.


사람을 알아본다는 건, 단순히 상대의 맨얼굴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과 어떤 관계인지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때론 알아채고 싶지 않은 진실을 마주하게 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관계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나면 마음이 오히려 편해지기도 한다.


세상엔 모두에게 좋은 사람도, 모두에게 나쁜 사람도 없다.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선의나 악의가 혼란스러울 땐 성급히 답을 내릴 필요가 없다. 중요한 건 상대를 어떤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를 오해 없이 아는 것이니까.


만약 내가 상대에게 ‘불필요한 사람군’으로 분류된 것을 깨닫는다면 굳이 억지로 그 관계를 바꾸려 노력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가 가진 기준은 바꿀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선택권은 나에게 있으니까.


그 관계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지 않고 나 역시 상대를 나의 삶의 조금 더 먼 곳에 두기로 한다면, 이 관계도 나도 조금 더 편해질 수 있다. 관계에서 받은 스크래치는 결국 그 관계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했는가에 달려 있으니까. 상대에게 불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현실을 냉정히 받아들이는 건 조금 씁쓸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기도 하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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