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는 감정에도 이유는 있다
이상하게 싫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게 없고,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닌데,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피로하다. 나도 안다. 이건 내 문제다. 그런데 문제라고 해서,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싫어."
그런데 어쩌면, '이유 없음'은 가장 정교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감정은 판단보다 빠르다. 하지만 더 똑똑하다
논리보다 감정이 느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감정은 대뇌피질이 분석을 마치기 전에 이미 결론을 내린다. 굳이 분석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호랑이는 이미 달려든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알고 있었다.
나에게 불쾌감을 주는 사람은, 감각기관과 생존 본능이 감지한 '기묘한 패턴'일 수 있다. 그 사람이 과하게 눈을 맞추거나, 말의 간격이 이상하거나, 개인적 공간을 미묘하게 침범하거나. 말할 때는 웃는데 눈은 안 웃는다든지, 내가 말할 때마다 0.1초 늦게 고개를 끄덕인다든지, 이름을 지나치게 자주 부른다든지.
아무도 이상하다 하지 않지만, 나만 이상하다고 느낀다. 이건 예민함이 아니라 감각이다. 마치 고양이가 지진을 미리 감지하듯, 나의 직감도 때때로 언어가 포착하지 못하는 신호를 읽는다. 감정은 설명하려 할수록 멀어진다. 오히려 직관은 생존의 가장 오래된 언어다.
우리는 이성이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고 배웠지만, 때로는 감정이 이성보다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왜 싫은지 모르겠다는 것이 때로는 가장 정직한 답이 되기도 한다.
내가 싫어하는 건 '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싫음은 종종 대상을 향하지만, 실은 그 대상이 '촉발'한 내 안의 어떤 감정일 수 있다. 상대의 자기 연민이 내 안의 혐오감을 건드리고, 불쾌한 친절이 피로감을 자극하고, 과도한 경계 해제가 경계심을 일깨운다. 중요한 건 타인의 성격이 아니라, 그 사람이 풍기는 기류와 감정의 조합이다. 그 조합이 나에게 어떤 ‘역할’을 암묵적으로 부여할 때,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싶어진다.
어떤 사람은 나를 조언자처럼, 또 어떤 사람은 청중처럼 소비하려 한다. 나는 누군가의 역할극에 캐스팅될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때, 본능적으로 물러선다. 이런 역할 부여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건 말투, 표정, 눈빛처럼 아주 사소한 신호로 전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과하게 친절하다. 말도, 표정도, 말투도 정성스러운데 어딘가 과하다. 그 과함은 따뜻함이 아니라 계산처럼 느껴진다. 혹은, 말은 예의 바른데 눈빛이 어딘가 느슨하거나, 표정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그런 미세한 어긋남은 경계심을 자극한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보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 때문에 물러선다.
표면은 예의지만, 그 예의가 너무 매끈하면 오히려 진심이 보이지 않는다. 감정은 그런 ‘매끈한 위장’을 가장 먼저 알아챈다. 마치 물이 기울어진 곳으로 흘러가듯, 관계에도 자연스러운 기울기가 있다. 그 기울기가 일방적으로 나를 향해 있을 때 느끼는 불편함은, 어쩌면 균형감각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그 사람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씌우려 한 역할을 거부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싫음'은 사회화 이전의 나일 수 있다
'예의', '배려', '함께 살아야 하니까'를 내면화한 우리는, 때로 너무 늦게 반응한다. 그래서 싫음은 죄책감과 짝을 이룬다. 착한 사람은 싫어해도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이 있다.
하지만 싫다는 감정은 가장 원시적인 자기 보호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몸은 반응하고 있다. 얼굴 근육이 굳고, 땀이 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싫음'은 나를 나답게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 보호막이다.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살지만, 그 틈새로 새는 감정이 진짜 '나'니까.
우리는 '좋은 사람'의 의무감에 중독돼 있다. 싫은 감정조차 예의 있게 숨기며, 그게 성숙이라 믿는다. 하지만 감정을 숨기는 것과 감정을 부인하는 것은 다르다. 숨기는 것은 전략이고, 부인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때로는 사회적 예의보다 개인적 직감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도 필요하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어쩌면 더 솔직한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누가 먼저 날 경계했을까
내가 누군가를 설명 없이 싫어했던 것처럼, 누군가는 나를 보며 경계를 세웠을 것이다. 그건 감정의 오해라기보다, 인간 사이의 본능적 거리 두기 장치일지도 모른다.
싫다는 감정은 미성숙함의 증거가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키려는 직관이다. 마치 식물이 햇빛을 향해 자라듯, 인간도 자신에게 맞는 환경과 사람을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맞지 않는 것들을 거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그 감정을 없애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그냥 들어주는 것도 방법일지 모른다. 감정을 고치려 하지 말고, 감정이 전하는 메시지를 읽어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결국 '왜 싫은지 모르겠다'는 말은 '아직 알아가는 중'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나를 알아가는 중, 타인을 알아가는 중, 관계를 알아가는 중. 그 과정에서 느끼는 불편함마저도 삶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가장 성숙한 태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