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 과잉 시대의 피로한 청중들
번화가의 매장 안, 보라색 머리끈 하나를 집어 들었을 뿐인데, 옆에서 “앗, 그건 내 색인데”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잠깐, 보라색이 개인 저작권이라도 등록되어 있었나?
이 사람은 평소에도 보라색을 자기 정체성처럼 말하곤 했다.
“나 보라 덕후잖아, 남친도 보라색 보면 내가 떠오른대.”
그녀에게 보라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 브랜드였다. 그걸 통해 타인에게 특정한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무심코 그 색을 고른 나에게조차, ‘그건 내 거’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졌다. 무지개 스펙트럼 중 하나가 언제부터 누군가의 전유물이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그냥 다른 색을 골랐다. 그게 평화로운 길이니까.
하지만 그 순간 스쳐간 묘한 불편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색 하나에도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타인에게 조용히—그러나 확실하게—강요하는 사람들. 이들은 언제부터 세상 모든 것에 자기 서사를 덧씌우기 시작했을까?
내러티브 중독자, 일명 ‘자아비대형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세상 모든 것을 자기 이야기로 편집한다는 점이다. 평범한 자연현상, 흔한 색깔, 심지어 타인의 경험까지도 그들의 개인적 스토리와 브랜딩에 탈취당한다.
“오늘 비가 마치 내 마음을 알고 내리는 듯 해.“
아니, 비는 그냥 비다. 당신의 감정 상태와 협의한 적 없다.
바에서 노래가 흘러나오자 “사장님이 내 생각을 읽었나봐. 노래들이 딱 내 무드야.”라고 말한다. 사장님은 그냥 플레이리스트 틀어놨을 뿐인데, 온 우주가 그를 위해 음악을 큐레이션한 것처럼 여긴다.
“나라면 그렇게 안 했을 텐데.”
그런데 아무도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당신은 주인공이 아니다. 최소한 이 장면에서는.
특히 웃긴 건, 이런 사람들은 남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까지 통제하려 든다는 점이다. 누군가 “자신감 없어 보여”라고 한마디 하면, 그때부터 무리하게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나는 원래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라며 긴 자기 어필을 시작한다. 남들 눈에 비친 모습조차 자기 마음대로 편집하려 하니, 대화는 더 피곤해진다.
이런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그들의 1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강제로 시청하고 있다. 자막도 없고, 건너뛰기 버튼도 없다. 그들은 말을 멈추지 않고, 나는 탈주 타이밍을 계산하느라 바쁘다. 보통 시즌 3쯤에서 포기한다.
우리는 지금, 모두가 자신만의 1인 방송국을 운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문제는 시청자는 없는데 방송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한국 사회 특유의 구조가 빚어낸 작품이다.
우리는 동시에 두 가지 모순된 요구를 받으며 자란다.
“너답게 살아라” 와 “남들보다 잘해라”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개성을 요구받고, 획일화된 기준 안에서 특별함을 증명하라 한다. 이 미션을 수행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사력’이 생존 무기가 된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을 단순히 ‘사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연이며, 심지어 감독까지 겸한다. 자기 인생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처럼 연출하고, 일상의 모든 순간을 ‘의미 있는 장면’으로 포장한다.
문제는, 이 시나리오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다. 진짜. 아무도.
카페에서 “이 자리는 제가 항상 앉던 자리에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그 자리에 명패라도 붙어 있나?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주다가 “나도 그랬어”로 시작해 20분간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은? 공통의 추억을 나누려 할 때, “그때 내 기분은…”으로 대화를 하이재킹하는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스핀오프 드라마를 촬영하느라 바쁘다. 그런데 시청률은 참담하다.
한국이 집단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개인주의보다 더 개인적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자기만의 해석을 고집한다. 하지만 정작, 서로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모두가 주인공이지만, 모두가 외롭다.
사실 이건 일반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명인이나 정치인들을 봐도 그렇다. 조용히 일하는 사람은 언급되지 않고, 요란한 사람일수록 언플과 자기 포장에 집착한다.
말은 많고, 표정은 연출돼 있고, 업적은 과장돼 있다. 본질이 탄탄한 사람은 굳이 자기 서사를 덧칠하지 않는다. 조용한 사람은 진짜고, 요란한 사람은 자기 방송 중이다.
이런 자아비대형 부류들을 한 날 한 자리에 모아놓으면 어떨까? 아마도 진짜 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A가 자기 이야기를 하면, B는 그걸 자기 경험으로 이어붙이려 하고, C는 듣는 척하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결국 세 사람이 앉아 있어도, 각자 혼잣말하는 세 개의 채널이 동시에 송출되는 셈이다.
그들은 피드백도, 공감도 원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청중’이 있으면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말하고 싶어 하니까,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이상한 일이다.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으면서도, 정작 서로에게 조연조차 되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 크게 외치고, 더 요란하게 자신을 어필하며, 더 집요하게 관심을 끌려 한다.
악순환이다. 불쌍한데 피곤하고, 짜증 나는데 이해되는.
하지만 너무 조롱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실은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까 더 과하게 포장하고, 더 집요하게 자기만의 정체성을 긁어낸다. 그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어기제다. 지워지지 않기 위해 더 크게 말하고, 잊히지 않기 위해 더 특별한 척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 너무 시끄럽고, 너무 피곤하다. 보는 사람도 지치고, 하는 사람도 지친다.
가장 웃픈 건, 정작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은 대체로 조용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기 색을 선언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억지로 주인공 노릇을 하지 않아도 존재감이 있다. 말하지 않아도 들린다.
자기만의 색을 가진다는 건 분명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걸 타인에게 주입시키려 하거나 독점하려 드는 순간, 그건 개성이 아니라 억압이 된다.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당신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게 나쁜 일은 아니다.
당신이 조명 아래 있지 않아도, 무대는 계속 돌아간다.
당신이 나레이션을 멈춰도, 이야기는 흐른다.
가끔은 조명을 끄고 무대에서 내려와 보자.
관객석에 앉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그 나름대로 꽤 괜찮은 장면이 될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