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입장이 먼저 정해지는 시대의 역설
사람들은 늘 어디에 서야 하느냐를 묻는다. 선을 긋고, 그 선 너머를 경계하고, 넘어선 자를 의심한다. 한쪽은 옳고, 다른 쪽은 틀렸다고 믿는 눈빛이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세상의 복잡함은 너무 부담스러워서, 간단한 색깔과 구호로 나누는 것이 편해진다. 생각 대신 진영, 질문 대신 신념이 자리 잡는다.
하지만 그 편안함은 사람을 무디게 만든다. 깃발은 사람을 품지만, 동시에 눈을 가린다. '우리'의 잘못은 애써 감싸고, '그들'의 실수는 끝없는 분노로 부풀린다. 그렇게 한쪽만을 바라보게 되면 균형은 무너지고 판단은 굳는다. 더 이상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편과 틀림만이 남는다.
나 역시 한때는 어느 한쪽 편에 서서 확신을 품고 있었다. 믿음이 강할수록, 그만큼 상대를 단순화하고, 틀렸다고 단정짓기 쉬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확신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있다는 감각. 그렇게 좁아진 시야가 결국 나를 스스로 가두고 있다는 걸 조금씩 깨달았다.
그때부터 자기 확증 편향의 덫을 경계하려고 애썼다. 옳다고 믿는 생각이 항상 균형 감각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걸, 그리고 믿음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스스로의 판단을 자주 점검하려 했다. 내가 믿는 바를 지킬 때에도, 그 안에 나의 편향이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려 했다.
누구의 깃발이 너무 높이 올라가면 바람이 그쪽으로만 불지 않도록 반대편에 섰다. 그 깃발이 싫어서가 아니라, 균형이 무너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한 손에 칼을 쥔 자가 다른 손에 방패까지 들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지켜온 균형의 감각도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한 깃발 아래로 지나치게 많은 힘이 모여들었다. 목소리가 달라야 할 공간에서 같은 구호만 울려 퍼졌고, 서로를 견제해야 할 손들이 서로를 덮어주기 바빴다. 책임은 미뤄지고, 문제는 침묵 속에 묻혔다. 공정함은 어느새 내 편에게만 관대한 말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처음엔 그것을 일시적인 흐름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쏠림은 점점 구조로 굳어지고, 마침내 고착화되었다. 깃발은 더욱 거대해졌고 바람은 한 방향으로만 불었다. 그 안에선 누가 무슨 잘못을 해도 그 깃발 아래 있다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받았다. 반대편의 실수는 날것의 분노로 도려졌고, 같은 실수조차 그 안에선 전략이자 희생으로 포장됐다.
아마도 사람들은 복잡한 균형을 감당하기보다, 단순한 선과 편을 나누는 쪽이 훨씬 덜 피로하다고 느끼는지도 모른다. 생각은 어려운 일이지만, 편은 쉽다. 명확한 구호와 선명한 표식은 복잡한 질문을 덜어주니까.
그 단순함 속에서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일은 쉽게 정당화된다. '그들은 틀렸고, 위험하며, 그래서 응징받아야 한다'는 확신은 의심을 밀어낸다. 그 위에 올라탄 조리돌림은 일종의 응징 의식처럼 반복된다. 복잡함을 감당하는 대신, 단순한 배척이 더 빠르고 간단하다.
나는 깃발들 사이에 서 있지만, 그 균형이 항상 같은 거리라는 뜻은 아니다. 옳다고 믿는 순간엔 어느 한쪽에 더 가까이 서기도 한다. 하지만 그 거리 조정의 기준은 진영이 아니라 생각 그 자체다.
요즘 나는 누구의 소속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어떤 선택을 제시하는지를 먼저 본다. 익숙하지 않은 입장이라 해도 그것이 균형에 필요한 방향이라고 생각되면 귀 기울일 때도 있다. 그러다보면 뜻하지 않게, "그럼 너는 그런 사람들을 옹호하는 거냐"라는 말이 돌아오기도 했다. 무엇을 말했는가 보다 어느 편에 섰는가가 더 중요해진 시대가 되었다. 생각보다도 선명한 입장이 더 강한 믿음을 만든다.
하지만 나는 이럴 때일수록 더욱 균형점에 서 있으려 애쓴다. 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양쪽이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긴장이 사라진 구조는 감시와 견제가 사라진 구조다. 줄이 존재하지 않으면 목소리는 하나가 되고, 그 하나는 언제든 폭력이 될 수 있다. 살아 있는 구조는 늘 긴장 위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깃발을 보고 환호하거나 분노한다. 하지만 나는 그 깃발들이 공중에 펄럭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본다. 누군가는 그걸 회색이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비겁함이라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가장 어려운 선택이라 믿는다. 그 자리엔 열광도 없고 박수도 없다. 하지만 그 투명한 무게 없이는 깃발도, 줄도, 바람도 존재할 수 없다.
소리치지 않아도, 열광하지 않아도 흐름을 거스르는 건 결국 생각을 지키는 일이다. 그 작은 생각이 때로는 가장 단단한 저항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