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누굴 곁에 두고, 누굴 걸러야 한다고요?

‘좋은 사람 선별법’이 인간관계를 망치는 이유

by 그냥 하윤

SNS를 스크롤하다 보면 사람을 분류하는 글이 여전히 유행이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손절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곁에 두세요.”


마치 인간관계를 가이드북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듯, 그 리스트들은 어딘가 그럴듯한 어조로 사람을 설득한다.

사실 이런 건 고릿적 페이스북 시절부터 꾸준히 흘러온 유행이다. 나도 한때는 그런 글을 읽으며, 머릿속에서 주변 사람들을 조용히 끌어다 놓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조금 더 먹고, 관계라는 걸 조금 더 겪어보니 그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마치 가성비로 나누는 물건처럼 다루는 태도에서, 묘한 찝찝함이 피어올랐다. 도대체 언제부터 인간이 이렇게까지 취사선택 가능한 존재가 됐을까.




그런 글들은 종종 전제 하나를 깔고 있다. ‘나는 이미 괜찮은 사람이다.’ 즉, 나는 곁에 둘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 남들을 분류하겠다는 자세다. 마치 교통법규 위반자는 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진 운전자처럼 말이다.


‘반드시 걸러야 할 사람’ 같은 문장은 결국 내가 신성한 인간 필터링 머신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내 기준이 진리인 양 굴어야만 성립되는 얘기다.


‘내 주변에 두어야 할 사람’도 마찬가지다. 마치 ‘내 인맥 합격자’를 뽑는 거대한 오디션장 같다. 인간 구독 서비스처럼, 편한 기능만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해지해버리는.


자기를 지키기 위한 기준을 갖는 건 필요하다. 문제는 그게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처럼 포장될 때다. 그리고 그 기준들이 대부분 감정적으로 편한 사람만 남기고, 불편한 사람은 다 잘라내자는 식일 때다. 관계를 이렇게 소비의 관점으로 다룰 때, 우리는 점점 더 혼자 남게 된다.


사람을 걸러낸다는 말에는 은근한 오만함이 숨어있다. 내가 기준이고, 내가 판사이며, 상대방은 그 기준에 맞춰 평가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전제 말이다. 하지만 관계에서 우리는 모두 평가자인 동시에 피평가자다. 그리고 그 역할은 시시각각 바뀐다. 오늘 내가 누군가를 평가하고 있다면, 내일은 내가 평가받는 입장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인간관계는 피로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사회적 문맥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기본적인 배려조차 결핍된 채 내 에너지 위에 올라타면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된다. 그건 인간성의 결함이 아니라 생존 본능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누군가와 멀어진다는 사실이 곧 그 사람을 ‘정리 대상’으로 분류할 명분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건 다르다.


“저런 사람은 걸러야 해” 라고 선언하는 대신, “나는 저 사람과 잘 안 맞아“, ”난 피곤해서 감당이 안 돼” 라고 고백하는 쪽이 더 정직하다. 왜냐면, 인간이란 원래 그렇게까지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니까.


가끔은 이런 생각도 종종 한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느낀 누군가도, 똑같은 어조로 나를 묘사하고 있진 않을까? 결국 우리는 각자의 시선 속에서 정상이자 문제고, 기준이자 혼란이다.


모두가 자기가 평균값이라고 믿는 사회에서, ‘걸러야 할 사람’이란 말은 결국 거울을 보고 하는 독백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피곤한 시기를 통과한다. 그리고 그 시기엔 누구나, 타인에게 불편한 존재가 된다. 나 또한 누군가의 눈에는 과하게 관찰하고 과하게 비판하는 피곤한 인간군상이다.


그런 내가 타인을 쉽게 분류하고 선별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된다. 관계는 흑백으로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곁에 둘 자격’ 같은 건, 냉정하게 따지면 누구에게도 없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서야 깨달았다. 건강한 인간관계는 평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 성찰과 피로감 사이에서 유지된다는 걸 말이다. 때로는 거리를 두고, 때로는 다가서며, 순간마다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것. 그게 전부다.


모든 인간은 외롭다.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을 그렇게 열심히 걸러내다 보면, 언젠가는 곁이라는 공간 자체가 텅 비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사람 때문에 지치고, 사람 덕분에 버틴다. 그 불편하고 아름다운 이중성이,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적 모순이자 아름다움이 아닐까. 결국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러니 이쯤에서 멈추자. 사람을 리스트로 나누는 일 말이다. 대신 내 피로를 인정하고, 상대도 나만큼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자.


우리는 결국 서로의 이상함을 감내하며, 오늘도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이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편 가르기의 시대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