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끝부터 차오르는 우울의 방식에 대하여
2022년의 겨울이었다. 도로 위엔 밤새 내린 비가 얼지 못한 채 번들거렸다. 출근 시간, 차들이 빠르게 오갔다. 나는 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지금 저 차에 치이면, 두 달 정도는 입원할 수 있겠지."
무섭지 않았다. 피나 부러진 뼈를 상상한 게 아니라, 단지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화가 난 게 아니라, 무감각해졌다는 걸.
예전에는 불만이 있었다. "회사에 운석이라도 떨어졌으면." 같은 유치한 상상으로 분노를 식히기도 했다. 적어도 그땐 무언가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감정이 희미해졌다. 불만도, 분노도 줄어들었고, 대신 벗어날 방법만을 생각하게 됐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그해 여름, 예정된 휴가는 무산됐다. 코로나로 인력이 빠지면 남은 사람이 그 몫을 떠안았다. 업무도, 야근도, 감정 조율도 모두 내 역할이었다. 제대로 쉰 날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언제부턴가 몸이 먼저 말을 꺼냈다. 걷다가 시야가 하얘지며 휘청거렸고, 엘리베이터 안에선 숨이 막혀 두 층 일찍 내린 적도 있었다.
병원에 가볼까 고민했지만, 머릿속엔 프로젝트 마감일이 먼저 떠올랐다. "이번 건만 끝나면." 연봉 협상, 평가 시즌, 프로젝트. 날짜가 붙은 일들이 체력보다 중요해 보였다. 몸이 보내는 신호는 그저 작은 오류처럼 여겨졌다. 커피 한 잔과 빌려온 밤이면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퇴근 후, 밤마다 강아지를 데리고 아파트 뒤편 산책로를 올랐다. 운동하러 갈 시간조차 없을 만큼 내 하루 스케줄은 늘 빠듯했지만, 이상하게 이 산책만큼은 거의 매일 지켰다. 몇 분만 걸으면 도로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자리가 나왔다. 불빛은 여전히 반짝였고, 차들은 쉴 새 없이 지나갔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언덕진 촌동네라며 택시도 꺼리던 시절부터 살아온 이곳이, 이제는 동네 이름을 말하면 "좋은 곳 사시네요"라는 반응이 돌아올 만큼 제법 그럴듯한 환경이 갖춰졌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주변의 변화와는 다르게, 나는 별 볼 일 없는 현재에 매몰돼 있는 것만 같았다.
세상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어항 속을 맴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뻐끔거리며 숨을 쉬고는 있었지만, 그 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이 굴레가 언제쯤 끝날지, 아니, 정말 끝이 있기나 한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가끔은, 어항 밖 어딘가에서 잔잔한 파문이 전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물은 고요해 보였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라앉는 날들이 늘어갔다.
지금 돌아보면, 해일은 이미 먼바다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흐린 날씨 정도로만 여겼던 것 같다.
우울의 잠식은 그렇게 찾아온다. 처음엔 발끝을 적시는 파도처럼, 아주 조용히. 어떤 날은 유난히 피곤하고, 어떤 날은 말수가 줄며, 어떤 날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모든 게 귀찮아진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걸 단순한 피로쯤으로 여긴다. 잠깐 스쳐가는 기분 정도로.
하지만 물은 기다릴 줄 안다. 매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높아진다. 발목을 적시고, 종아리를 감싸고, 무릎까지 차오른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여전히 걷고 있다고 믿는다. 몸이 아프면 병이라 여기면서도, 마음이 아픈 건 기분 탓이라며 흘려보낸다.
"내가 우울할 리 없어. 일도 하고 있고, 사람도 만나고, 매일 잘 자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다.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목까지 잠겨 있었다는 걸. 숨을 쉬기 위해 발끝으로 서 있던 순간들이, 실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시간이었다는 걸.
우울은 꼭 '우울하다고' 느껴질 때 찾아오는 게 아니다. 전혀 우울하지 않다고 믿는 그 순간에도, 조용한 물은 계속 차오르고 있다. 먼바다에서 시작된 해일은 이미 해안가에 도착해 있었는데, 육지에 선 우리는 그저 파도 소리가 조금 더 크다는 정도로만 여겼다. 그래서 아무도 몰랐다. 물이 발등을 덮을 때까지도, 허리를 감쌀 때까지도. 나조차도.
나는 그걸 오랫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몸이 먼저 망가졌고, 감정은 멀어졌고, 그 속에서 여전히 일을 하고, 메일을 보내고, 출근을 반복했다. 우울은, 그 환경에서 벗어나며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매일 반복되던 책임과 눈치, 구조 속에서 한 발 떨어져 나오고 나서야, 그때의 내 표정과 말투, 습관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무너진 마음을 되돌리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조금씩 배워가기 시작했다.
중심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적당한 거리에서만 비로소 보이는 마음이 있다. 지금도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예전보다 조금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게 됐다. 그게 유일한 차이다.
나는 완전히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그건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괜찮지 않을 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걸 아는 감각이 앞으로도 날 붙잡아줄 거라 믿는다.
그러니 혹시, 요즘 들어 이유 없이 피곤하다면, 말수가 줄어들고 사소한 일에도 자꾸 귀찮아진다면, 그걸 그냥 넘기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몸은 마음보다 먼저 반응하고, 마음은 입보다 오래 아프다. 우리는 종종, 아주 늦게야 알아차리게 된다.
무너지기 직전까지도 사람은 생각보다 멀쩡해 보일 수 있다. 일을 하고, 약속을 지키고, 웃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자동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감정이 아닌 기능으로 하루를 견디고 있다면, 어딘가 이미 젖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물이 차오르고 있을지 모른다. 아직은 발끝뿐일지라도. 그게 전부 젖기 전에, 나도, 당신도, 잠시 멈춰서 물기를 확인해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일들이 있다. 그때 이미 조용히 물속에 있었음을, 그 순간에는 미처 몰랐던 마음의 무게를.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아주 작은 징후라도 스스로 눈치챌 수 있었으면 한다.
그렇게 한 발짝 물러서 바라보는 마음이, 우리를 다시 구해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