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만 가능한 사회에서, 피드백은 어디로 가는가
"그냥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더 나은 거 아니야?"
예전의 나는 그렇게 믿었다. 솔직한 피드백은 관계에 대한 예의이자, 성장을 돕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라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세계가 더 건강하다고 여겼고, 상대를 위한 말이라면 다소 불편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말을 삼키는 쪽을 택하게 됐다. 무례하지 않게 조심하고, 정중한 언어를 골라 써도, 돌아오는 건 종종 묘한 거리감이었다. 단지 "이건 아쉬운 것 같다"고 말했을 뿐인데, 마치 인격을 공격당한 듯 반응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요즘 사람들은 피드백을 듣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걸. 익숙해지려 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지금 '자존감'이라는 이름으로 불편한 목소리를 차단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 "상처 주는 사람은 멀리하라"는 메시지들이 처음엔 건강한 방어막이었지만, 어느새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두꺼운 유리벽이 되었다. 조언은 쉽게 ‘부정’으로, 지적은 곧바로 '공격'으로 전환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 생태계 자체가 비판을 구조적으로 배제한다는 점이다. SNS에 '좋아요'는 있어도 '아쉬워요'는 없다. 댓글로 건설적 비판을 남기면 악플러 취급받기 십상이다. 결국 사람들은 칭찬만 주고받는 데 익숙해졌고, 피드백은 조심해야 할 지뢰가 됐다.
물론, 요즘은 무분별한 악성 댓글이 넘쳐나는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부작용을 우려한 나머지, 건설적인 피드백마저 악플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는 경우가 늘고 있다. 비판을 공격으로 규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말은 더 조심스러워지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
나의 경험을 곱씹어 본다. 학교에선 늘 과제물에 순위가 매겨졌고, 공개적인 품평이 따라왔다. 처음엔 비교당하는 일이 자존심을 건드리고 상처로 남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과정을 받아들이게 됐다. 피드백은 아플 때도 있었지만, 더 이상 낯선 일은 아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며 마주한 피드백은 또 다른 결을 지녔다. 중간직이었던 시절, 상사는 모두가 있는 회의 자리에서 "너는 왜 신입보다 못하냐"는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 신입이 밤새워 만든 포트폴리오와 내 실무 위주의 결과물을 단순 비교하며, 면전에서 나를 깎아내린 것이다. 그것은 건설적인 피드백이라기보다는, 상사의 기분에 따라 휘둘리는 평가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그런 시간을 겪으며 하나는 분명해졌다. 좋은 피드백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나쁜 피드백은 사람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둘 다 겪어본 사람만이, 피드백의 가치를 구분할 수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성장을 말하지만, 누구도 "아프게 성장하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불편한 진실 대신, 부드러운 공감이 주가 된다. 피드백은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에서 멈춘다. 그다음 문장은 불청객이 된다. 점점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고칠 수 있는지보다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이유'를 찾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
예전에는 피드백이 성장을 위한 필수 영양소였다. 지금은 마치 방사능처럼 다뤄진다. 사람들은 자존감이라는 단어에 푹 빠졌지만, 정작 자아의 근육은 단 한 번도 쓰지 않으려 한다. 그야말로 '온실 속 자존감'이다. 따뜻한 말과 습한 공감 속에서 무성해지지만, 진짜 세상의 바람과 추위 앞에서는 쉽게 시들어버린다.
이런 상황은 집단적으로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서로 응원하는 에코 챔버 안에서, 잘못된 판단도 옳은 것처럼 강화된다. 피드백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을 인식할까? 오직 내부의 목소리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응원만 듣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기 인식이 아니라 자기 확신의 증폭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피드백을 대하는 태도는 결국 의도를 읽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말하는 이가 어떤 마음으로 건넨 말인지, 그 안에 조언의 가능성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 때로는 불편한 말조차 진심일 수 있고, 반대로 정중한 말속에 감정적인 상처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피드백을 곧장 인격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연습이다. "이 부분이 아쉽다"는 말은, 곧 "너라는 사람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감정을 거두고, 맥락과 내용을 분리해서 듣는 습관이 필요하다.
지금의 나 또한 매일 피드백을 받으며 산다. 클라이언트는 "고급스럽고, 예쁘게, 시인성 좋게, 근데 너무 튀지는 않게"라고 말하고, 나는 그 말속에서 의도를 해석하고, 디자인을 재조정한다.
경력이 쌓이며 부당한 피드백은 줄었지만, 여전히 피드백의 세계는 고요하지 않다. 그래도 나는 안다. 피드백을 견디는 일은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것은 여전히 나를 피곤하게 하지만, 동시에 가장 확실한 방향 감각이기도 하다.
모든 피드백이 옳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비판 그 자체를 금기시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좋은 비판마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는 모두 조금씩 성장의 기회를 잃는다. 그래서 더더욱, 불편한 말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이 귀해지는 시대다. 그리고 그건, 나 자신부터 훈련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말이 더 이상 현실이 아닌 시대. 그걸 만들어가는 일은, 결국 우리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