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정 중독 사회에서 살아남기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는 우리에 대하여

by 그냥 하윤

우리는 늘 누군가의 시선을 상정하며 산다. 내가 입은 옷, 말투, 표정, SNS에 올리는 말까지. 어떤 선택을 하기 전에 '이걸 보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를 먼저 떠올리는 습관. 그 말은 곧, "어떻게 보여야 인정받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뼛속 깊이 박혀 있다는 뜻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체는 자연스럽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본능적으로 무리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인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인정이 수단에서 목적으로 전도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라는 원형을 잃어버리기 쉽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보다, 남들이 좋아할 만한 나를 먼저 설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의도된 이미지로 자신을 꾸려나간다. 그게 반복되다 보면, 나는 나인데 나 같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한국 사회는 이 인정욕구를 체계적으로 배양한다. 어린 시절부터 '착한 아이'라는 틀에 맞춰 감정을 다듬고, 시험 점수라는 숫자로 자아를 서열화한다. 집안의 자랑거리가 되기 위해 우리는 일찍부터 '증명 가능한 나'를 연출하는 법을 배운다.


SNS는 이 인정욕구를 가시화한 판옵티콘이다. 좋아요 수, 댓글, 조회수라는 숫자가 내 가치를 실시간으로 측정하는 체온계 역할을 한다. 이 디지털 체온계에 중독되면, 우리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나'를 포장하여 전시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기획된 자기 자신을 살아가게 된다.


인정욕구가 무조건 나쁜 것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타인의 기대를 일정 부분 수용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욕구가 욕망으로 번질 때 상황은 달라진다. 누군가를 만족시키려다 정작 나를 다 태워버리는 순간, 인정은 족쇄로 돌변한다.


게다가 인정욕구는 채우려 할수록 더 비어가는 그릇이다. 잠깐의 만족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허기가 몰려온다. 아무리 채워도 바닥이 보이는 항아리처럼, 타인의 인정을 기대하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목이 마를 것이다. 그 항아리는 애초에 구멍이 난 그릇인지도 모른다.


자기계발 열풍 역시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다움을 찾는다고 하면서, 실은 '인정받을 수 있는 버전의 나'를 설계하는 중이다. 성장하고 싶다기보다는 성장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것이다. 모두가 성공의 가면을 쓰고 바쁨의 포즈를 취하며 성장의 미장센을 연출한다. 그 연극에서 조금만 뒤처져도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온다.


이렇게 살다 보면, 정작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은 드물어진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자존감의 빈자리를 메우는 일종의 마약처럼 작동하기 시작한다. 즉각적 쾌감은 주지만, 그게 사라지는 순간 다시 불안이 몰려온다. 중독의 메커니즘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의식하는 '타인의 시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내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관객들이다. 그들의 판단을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검열하는 것은 결국 내가 나에게 가하는 일종의 자기 감시에 불과하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감옥에서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것이다.


그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꾸미고 다듬는다. 좋아 보이기 위해, 대단해 보이기 위해, 혹은 단지 뒤처지지 않기 위해. 그렇게 '남이 볼 나'를 기획하다 보면, '내가 느낄 나'는 점점 흐려진다. 타인의 환호를 염두에 둔 삶의 연출은 어느새 일상이 되고, 결국 연출된 자아가 진짜라고 믿기 시작한다. 갈채가 줄면 불안해지고, 박수가 끊기면 다시 포장을 고친다.


그러나 인정욕구는 타인이 만든 병이 아니라 어쩌면 스스로가 만든 병일지도 모른다.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내 선택에 스스로 확신을 갖지 못해서, 자꾸 남을 경유해 나를 증명하려 한다. 타인의 기준을 빌려와 나를 세우고 그 위태로운 탑 위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는다.


그 인정이 진심인지 습관인지, 아니면 단지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위장이었는지조차 구분되지 않는다. 누가 나를 바라보지 않는 순간,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이 밀려온다. 그래서 더 화려하게, 더 열심히, 더 빨리 인정받으려 애쓴다. 그러다 보면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무엇이었는지 잊는다. 마치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려 계속 뛰어다니는 아이처럼,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좇아 헛된 경주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왜, 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그 물음 앞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대답은 언제나, 너무 정직해서 아프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듣기 좋은 말만 살아남는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