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감정이론에 감정이입하는가
누군가가 슬퍼할 때, 나는 먼저 감정을 느끼기보다 '왜 슬플까?'를 묻는다. "감정은 왜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이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인가?"보다 먼저 떠오른다. 감정을 공감하기보다, 해석하려는 충동이 앞선다.
그건 남의 감정뿐만이 아니다. 가끔은 내가 슬플 때조차도, 그냥 '슬프다'고 느끼기보다는 "내가 왜 슬픈 느낌이 드는 걸까?"를 먼저 분석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슬픔은 언제나 조금 늦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건 외로움인가? 상실감인가? 기대가 깨져서인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 감정은 어느새 사건처럼 조각나 있고, 나는 그 잔해 속에서 의미를 조립한다. 그리고 그렇게 조립한 감정만이 나에겐 '진짜'라고 느껴진다.
이건 보호기제인지, 지적 습관인지 애매하지만 중요한 건 감정을 살아 있는 상태로 다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뜻한 인간관계에선 약간 기능 장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감정을 이론의 틀 안에서 이해하려는 충동이 먼저 작동하니까.
감정의 인지 평가 이론을 볼 때마다 "맞아, 이런 구조로 감정이 흐른다고 하면 너무 납득돼!" 같은 기묘한 쾌감이 있다. 감정을 '느끼는 것'보다 '이해하는 것'이 더 안정적이니까. 감정은 해석 가능한 기호 체계로 변환될 때 비로소 통제 가능한 무엇이 된다.
감정이론에 끌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론은 정제되어 있고 안전하다. 감정은 살아 있고 불안정하다. 나는 불확실한 경험보다 구조와 패턴에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이론에 감정이입하고, 감정엔 이론적 거리두기를 둔다.
이건 약간 마음을 드라마로 보는 게 아니라, 스토리보드로 보는 것 같다. 그 장면에서 어떤 감정이 터졌는지가 아니라, 언제 어떤 구도로 진행됐는지를 분석하려는 식이다. 즉흥적으로 휘몰아치는 감정보다, 편집 가능한 감정 서사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
케이스 : 내 감정은 항상 나중에 도착했다.
어떤 관계에서 웃고, 서운하고, 망설이면서도 "이게 무슨 감정이지?" 하고 계속 거리를 둔다. 감정은 느낌이 아니라 결론으로서 찾아온다.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잔해를 고고학자처럼 발굴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다:
"나는 그 사람이 좋아. 볼 때마다 심장이 뛰어!"
내 반응은 이렇다:
"심장 박동수가 증가했고,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그 사람 이름이 자꾸 떠오르네. 이건 호감 신호인 걸까?"
결과적으로 나는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 아니라 감정을 관찰하는 인간이었다. 내 뇌는 매번 이 감정이 진짜 맞는 감정인지, 착각이 아닌지, 사회적 학습의 부산물이 아닌지 검열하느라, 감정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 진심을 승인해준다. 관계가 끝난 후에 "아, 좋아했었구나." 하는 건 그래서 나에게 되게 익숙한 서사다.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늘 감정의 사후감식반처럼, 끝나고 나서야 조용히 감정을 해석했다. 때로는 몇 달, 때로는 몇 년 뒤. 그렇게 잊혀진 기억을 고고학자처럼 다시 발굴해낼 때서야 사랑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도, 서운함도, 다정함도, 나중에야 아는 사람. 감정을 분석해서 안다는 건, 감정을 느꼈다는 것과 같은가?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다. 나의 감정은 늘 늦게 도착한다. 그리고 그걸 알았을 땐, 이미 무대는 끝나 있었다.
감정을 이론으로 정리하는 행위는 일종의 안전장치다. 통제 가능한 구조 속에서 감정을 관리하면 덜 아프고, 덜 혼란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그 거리두기 때문에 살아 있는 감정이 지나가버리는 아이러니도 있다.
나의 사랑은 추론이고, 나의 감정은 실시간 생방이 아니라 딜레이 방송이었다. 감정을 실시간으로 '사는' 게 아니라, 사건처럼 '해석'하는 인간 프로토콜.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같음"을 먼저 발견한 다음, 그걸 논문 쓰듯 검토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감정은 나에게 있어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분석되는 것이었다. 그게 편하면서도, 조금은 아쉬운 일이다. 감정이 종종 나중에 발견되는 잔해라는 것, 그래서 나는 감정의 고고학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살아 있는 감정을 놓치는 대가로, 나는 감정을 설명할 언어를 갖게 되었다. 아마 그게 나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