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My 모스크바
누구는 긴 열차 여행 후 도착지의 땅에 키스를 한다고 했다. 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중간에 내렸다 다시 탔기 때문에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자기 갈 길에 바빠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 얼른 몸을 숙여 모스크바의 땅에 아주 살짝 입술을 대고 곧바로 일어섰다. 다행히 아무도 나의 괴상한 행동거지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오! 오우! 다들 모스크바에 도착한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든 느낌은 안도감. 물론 또다시 열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지만 그래도 시베리아 횡단 열차와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두 번째 든 느낌은 '다신 안 탈 거야'. 제발 이 느낌이 맞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마침내 행복감과 함께 성취감을 느껴졌다. 내가 모스크바 땅에 서 있다니! 이건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었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지하철이었다. 한없이 쭉쭉 지하로 에스칼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야 승차홈에 다다를 수 있는 모스크바의 지하철. 물론 지하철 역은 무슨 궁전처럼 아주 우아하고 예쁘게 장식해 놓고 그것도 각 역마다 황홀할 정도로 멋지지만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긴 에스칼레이터가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졌다. 상하 방향이 붙어있어서 혹시 반대편으로 타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자인 스킨 해드가 내 뺨이라도 한 대 치고 갈까 늘 불안했다. 지하철 내에서도 사실 거리를 걸으면서도 스킨 해드와 마주치면 어쩌나... 영국 어학연수 시절에 10대 어린 소년들이 던진 콜라병을 맞을 뻔했던 사간 이후로 난 피부가 허연 그들이 그냥 싫었다.
어쨌든 모스크바에서의 2박 3일을 안전하게 별 탈없이 지내기를 기도하며 기차역과 멀지 않은 호스텔로 걸었다. 역시나 길을 헤매다 번화가가 나와서 사람들이 많이 보여 착해 보이는 모스코 바인에 길을 물으니 아주 친절하게 유창한 영어로 길을 알려준다. 흠... 왜 이렇게 친절하지... 이게 아닌데... 모스크바의 호스텔은 미로 같은 골목 안에 있었다. 그런데 걸어오면서부터 느낀 건데 모스크바 여자들 너무너무 예쁘다. 나도 모르게 호스텔 립셉션에서 일하는 두 명의 마론인형 같이 생긴 얼굴이 조막만 한 여자들에게 너네 어떻게 그렇게 예뻐??? 사람이니? 인형 아니니? 모든 러시아 여자들은 정말 다 이뻐 라고 감탄을 그것도 큰소리로 하고 말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우리는 안 이쁜데? 보통의 얼굴이야 였지만. 사실 모스크바를 걸으며 얼굴을 들고 다니는 게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보통의 흔하다는 그 여자들 때문에.
온갖 국적의 남녀 여행자가 한방에서 묵는 도미토리 한편에 짐을 내려놓고 일단 그동안 단 한 번도 하지 못한 빨래를 하기 위해 세탁실로 가 옷들을 세탁기에 돌리고 샤워를 했다. 살 것만 같다. 샤워를 하면서도 배가 몹시 고프다 느꼈다. 어서어서 세탁을 마치고 튀어 나가 뭔가 먹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러시아 여행은 비싼 외식 때문에 주로 슈퍼마켓에서 재료를 사와 호스텔 주방을 이용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게 정석이라고 했다. 하지만 슈퍼에 들르지 못해서 이번만은 외식을 해야 했다. 게다가 난 샌드위치를 만드는 법도 모르는 그냥 밥알이 최고라고 느끼던 때였다. 아... 빵 쪼가리 싫다,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주식이 된 으깬 감자는 보기만 해도 속이 쓰리던 나날들이 되었다. 아무튼 빨래를 말릴 대가 딱히 없어서 건조기까지 사용해서 5000원가량. 싼 값이지만 배낭 여행자에게는 큰돈이기에 이번 여행의 마지막이 될 세탁기 + 건조기 사용이 왠지 자랑스럽고 나 돈 많지?로 황당한 자부심까지 생겼다.
벌써 저녁때가 다 되어 기차에서 먹다 남겨온 도시락면으로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침대에 누워 내일 가 볼 곳을 조사하다 나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 배가 고팠다. 러시아에서 내내.
다음 날 아침, 주방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갑자기 중년의 동영인 커플이 들어오더니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여러 여행자들에 이런저런 말을 걸어 댔다. 오랜만에 가까이서 보는 동양인이라 반가웠고 그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길 바랬다. 그들은 아주 자랑스러운 말투로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며, 하지만 그리 유창하지 못한 영어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 좋은 의미로). 드디어 그가 나에게 말을 걸어 난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국적 말고 태어난 곳이 어디냐 물었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국. 이러더니 재빨리 상하이!라고 고쳐 대답한다. 흠...이라 생각했다. 그들 중 여자가 만드는 볶음밥의 향기란. 쌀도 들고 다니다니 정말 대단했다. 어찌나 쌀이 먹고 싶던지. 참을 수 없는 마음에 주방에서 멀리 달아나 호스텔을 나서려 할 때! 그 애가 리셉션에서 비행기표를 문의하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나와 함께 보드카를 훌쩍였던 불운의 그 중국애가.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야 해서 비행기표를 구하고 있다 했다. 모스크바 거리가 조금 두려워서 같이 다니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 애는 하루빨리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했다. 기차 침대에 오줌을 싼 벤의 안부를 물으니 자기도 모른다고, 중간에 기차를 내려 버린 것 같다고 했다. 좋은 여행 해 하고 작별 인사 후 그렇게 또 혼자 호스텔을 나서서 지하철을 타고 붉은 광장 근처에서 내렸다. 지하철 역을 황급히 빠져나오면서 다행히 아직까지 날 후려치는 놈들을 만나지 못했군 하고 안도했다. 갑자기 배가 고파 무언가 밥 다운 밥을 먹고 싶어 근처에 맥도널드에서 세트를 주문하니 5000원가량.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다시 신생아가 되어 손짓으로 힘겹게 겨우겨우 주문에 성공하곤 야외 좌석 끝에 자리를 잡고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정말 미친 듯이 씹으며 콜라를 마셨다. 원래 햄버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맛있을 수가. 남은 케첩까지 손가락으로 문대면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그럼 이제는 붉은 광장 쪽으로 걸어볼까. 붉은 광장 쪽은 죄다 외국인이어서 마음이 한결 편했다. 한국의 개발도상국 사람들도 이태원이 편할 테지 느끼면서. 정말 오랜만에 아무런 두려움 없이 러시아 거리를 활보해 보았다. 자유롭게.
9월 초의 날씨는 정말 추웠다. 잔뜩 흐려진 날씨. 참. 내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내렸을 때, 모스크바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비는 조금 그쳤지만 두꺼운 옷이 없어서 더 싸늘하게 느꼈던 것 같다. 겨울 옷은 영국에 방을 얻은 후에 동생에게 소포로 붙여달라고 하고 서울 집 박스에 보관하고 왔고 내가 가진 유일한 점퍼는 바람막이. 아무래도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니트라도 구입해야지 마음먹었다. 드디어 그렇게 보고 싶었던 성 바실리 대성당이 눈앞에 서있다. 성버실리 대성당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굼 백화점 그리고 오른쪽이 크렘린. 일단 미션 임파서블에서 톰 크루즈가 신부님 옷을 입고 날아다녔던 크렘린 궁전으로 들어갔다. 휴가철이 지나서 그런지 관광객이 그다지 많이 않고 조용했다.
돔 형태의 지붕이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정말 아름답고 특이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느꼈다. 돔 지붕이 9개나 되는, 그것도 황금빛의 이 사원이 햇빛도 없는 날에도 반짝반짝했다.
국립 역사박물관도 가 보고 싶었지만 가난한 여행자라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다음 여정지인 쌍트페쩨부르크의 박물관은 학생은 무료라 그곳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성 바실리 대성당. 이렇게 귀여운 예술품 같은, 아니 사탕과 과자로 만들어진 것 같은 성당을 만든 민족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전쟁과 학살을 일삼았는지 정말 슬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사진이 잘 나올까 하면서 다각도로 열심히 사진을 찌고 있는데 독일에서 왔다던 중년의 여성이 성버실리 대성당을 배경으로 독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외로웠던 철 라에 잘됐다 생각하며 사진을 찍어주니 내 카메라를 달라면서 내 사진도 찍어 주겠단다. 다행히 이 귀여운 성 바실리 대성당과 함께 내 사진도 생겨서 좋았다. 이번 여행 중 처음으로 찍은 내 사진. 원래 내 사진을 찍는 것을 즐기지 않는데 이렇게 예쁜 성당과 사진을 찍는 건 정말 영광이었다. 내부도 아기자기한 게 좋았다. 거금 1만 원의 티켓이 많이 망설여졌지만 내가 여길 언제 또 와보겠나 싶어서 십여분 고민 끝에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굼 백화점에 들러 치마를 하나 구입한 후에 다시 전철을 타고 숙소로 향했다. 그나저나 치마 시 이즈는 S 사이즈로 그동안의 육로 여행 중에 몸무게가 나도 모르게 줄어든 듯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숙소로. 나는 참 겁쟁이 여행자였다 그 시절에.
숙소 근처 슈퍼에서 먹을거리를 사서 호스텔 주방에서 간단히 으깬 감자 컵과 빵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비에 다 젖어버린 운동화를 빨아 히터 근처에 놓고 드디어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은 다행히 날씨가 참 좋아서 걸어 보기로 했다. 배낭을 호텔에 맡기고 나서려는데 거대한 캐리어 4개를 층계 아래 러기지 룸에 가져가며 힘겹게 숨을 쉬어대는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던 그 중국인 커플이 보였다. 저 캐리어 안엔 쌀과 반찬들이 잔뜩 들었겠지. 나는 차라리 안 먹고 가볍게 다니는 편이 좋다 생각하며 도와줄까 하다가 원래 여행자는 저기 짐은 자기가 드는 거야 라는 이론을 보태 그냥 모른 척하고 나왔다. 너무 힘들어 보여 도와주는 게 맞았을 텐데. 그 날 내내 죄책감이 들었던 것 같다. 저녁에는 러시아의 유럽이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행 기차를 타야 했다. 이리저리 그냥 걷다가 모스크바 예술거리 등 여러 명소를 구경했지만 저녁에 탈 기차 때문에 괜히 마음이 조급했다. 저녁 전에 호텔로 가 짐을 찾고 기차역으로 가 상트페테르부르크행 3등석 기차를 기다렸다.
그 중국인 커플도 같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차를 타는 게 보였다. 내일 새벽 5시 도착이라 새벽에 호스텔을 혼자 찾아가기 두려운 마음이 생겼지만 차마 그 중국인 부부에게 방향이 같으면 같이 택시를 타지 않겠니 하는 부탁은 할 수 없었다. 아침에 그들을 모른 척해버렸던 죄책감에 그냥 관두고 말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차에 타 보니 내 침대에 어떤 러시아 할아버지가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게 보였다. 어떻게 내 침대를 사수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