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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ngry Traveller Aug 04. 2017

비행공포증 Traveller의 육로 여행 3

시베리아 횡단 열차: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모스크바까지

크라스노야르스크 역 앞에는 몽골 여자애의 남편과 그의 엄마가 서서 신나게 손을 흔들며 특히 키가 크고 훤칠한 그 애의 남편은 들뜬 모습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의 엄마가 운전을 하고 그는 앞자리에, 나와 몽골 여자애는 차의 뒷자리에 앉았는데 내가 결혼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불타는 사랑을 하고 있는 그 둘 사이를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좀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앞자리에 앉은 남편이 그의 뒤에 앉은 몽골 여자애의 손을 잡기 위해 불편하게 쭉 뻗는 그의 손을 보고 나의 예감이 적중했음을 느꼈다. 내가 점찍어 둔 호텔로 이동하면서도 그의 손은 내내 몽골 여자애의 손을 꼭 잡고 있어서 나는 어서 빨리 호텔방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첫 번째로 점찍어 둔 호텔은 폐업상태. 다행히 몽골 여자애 가족은 나를 버리지 않고 내가 두 번째로 점찍은 호텔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방이 있는지 확인한 후 떠나 줬다. 몽골 여자애와의 이별이 아쉽기도 했으나 오래간만에 되찾은 자유가 나에겐 더 시급했던 모양이었던지 나는 체크인을 하고 서둘러 잠시나마 나 혼자만의 공간이 되어줄 싱글룸으로 뛰어 올라갔다.

1970년대의 서양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호텔방

방은 꼭 70년대 서양 영화에나 나올법하게 참 old 했다. 방에 화장실은 있었지만 좌변기와 세면대만 달랑 있었고 샤워를 하려면 2층 사무실로 가 공동 샤워장 열쇠를 받아 샤워하는 시스템이었는데 러시아어로 설명한 말을 내가 대충 알아듣는 게 너무 신통했다. 바디랭귀지에 대한 이해력과 상상력이 없었다면 절대 알아듣기 불가능했을 것 같다. 문득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안된다! 영국에 도달할 때까지 절대 긴장감을 늦추면! 속으로 되뇌며 이틀 동안 기차에서 묵은 먼지를 털러 간단한 세면도구를 들고 2층 사무실로 향했다. 자욱한 담배연기와 함께 타들어 가는 담배를 입에 문 사무장 아줌마가 어떤 여자와 뭔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장면은 어딘가 되게 익숙하다. 맞다. 나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 그 위압감에 수건을 목에 두른 채 뻘쭘하게 서서 기다리니 나를 쳐다본다. 세수하는 시늉으로 얻어낸 샤워장 열쇠. 아. 말을 배우지 못한 신생아가 된 느낌으로 곰팡이 때가 가득 낀 샤워실의 문을 끼익 하고 열어젖혔다.




눅눅했던 샤워장 안의 공기는 뜨거운 물을 틀자마자 아늑하게 바뀌었다. 말이 샤워장이지 샤워기가 달린 욕조 하나가 다였던 샤워장은 아주 뜨끈뜨끈하고 센 물살로 이틀 동안 기차에서 잔 내 몸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줬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샤워실이라 눈치가 보였지만 뜨거운 물로 오래도록 몸을 풀고 나와 다시 샤워장 열쇠를 사무장 아줌마에게 돌려주고서 방으로 돌아왔다. 맘이 급했다. 빨리 크라스노야르스크 시내로 나가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기차표를 사야 했기 때문에. 머리를 대충 말리고 시내 지도가 있는 트랜스 시베리안 론니플래닛을 들고 호텔을 나섰다. 호텔 앞은 긴 다리가 보이는 강가 근처였고 강가를 쭉 걸어나가 시내로 나가보기로 했다. 몹시 배가 고팠지만 기차표를 사야 내일 이 도시를 뜰 수 있기 때문에 너무 마음이 급했다. 기차역까지 가지 않아도 시내 한복판에 기차표를 파는 여행사가 있기 때문에 시내로 향했다. 은행으로 들어가 ATM으로 러시아 루블을 뽑은 후 여행사까지 걷는데 여행사가 도통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키가 큰 서양인들만 있는, 여행지로서 크게 인기가 없는 도시에서 게다가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러시아에서 키가 채 160cm도 되지 않는 동양인으로서 혼자 걷는 게 맘이 편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걸었다. 길을 걷다가 맘씨 좋아 보이는, 커다란 갈색의 밍크코트를 입고 있는 8월 초였지만 날씨는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싸늘했다)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다. 말이 도통 통하지 않아 론니플래닛에 적혀있던 여행사 이름과 주소를 보여주니 갑자기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찾아 쓰고 론니플래닛을 열심히 본다. 주소가 적힌 책을 보여주며 길을 물을 때마다 러시아인들은 이상하게 다들 돋보기를 쓰고 책을 유심히 바라본다. 나이는 고작해야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데 러시아인들은 노안이 빨리 오는 모양이라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기차표를 찍은 사진도 보여주니 아주머니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자기를 따라오라는 시늉을 한다. 아주머니는 나를 여행사 앞에까지 데려다주었다. 이럴 수가. 이렇게 친절할 수가. 지지금 껏 여행을 하면서 누가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준 적이 있었던가. 아마 있었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키가 크고 뽀얀 얼굴의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주머니의 친절에 용기를 내여 기차표를 사고 호텔로 바로 돌아가야지 라는 결심에서 도시를 돌아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여행사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3등석 기차표를 구매하는 데 성공했고 이제는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기로 결심했다. 일단 먹어야 할 것 같아 레스토랑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는데 원하는 음식을 골라먹는 카페테리아가 보였고 무엇보다 우리 돈 4000원 정도라 다른 레스토랑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서 먹기로 결심했다. 학생들이 이용하는 식당인지 죄다 어린 학생들만 앉아있었는데 내가 들어서자 식당 안의 사람들이 다 나를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다행히 아주 신기하고 반갑게 쳐다보고 있었다. 웃으면서 손까지 흔들어 줘서 표는 안 냈지만 속으로는 정말 많이 놀랬다.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어느 학생 전용 카페테리아

쌀이 먹고 싶었지만 쌀 대신 감자가 있어서 감자와 고기, 야채 등을 골라 자리를 잡아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이때만 해도 초창기 때라 으깬 감자가 어찌나 맛이 좋던지... 나중에는 감자만 보면 속이 쓰라릴 정도로 질려 버렸지만. 식후엔 역시 커피. 커피가 미치도록 좋았던 그때에는 각 나라를 돌며 커피의 맛을 음미하는 것이 크나큰 행복 중 하나였었다. 가만, 이제 론니플래닛에 나온 카페 중 한 곳을 들러 커피를 마셔보고 싶은데 어디가 좋을까... traveler's coffee 당첨. 오래간만에 그리 잘하지는 못하지만 영어도 쓰고 카푸치노도 마시고. ' have a nice trip'이라고 적어주기까지 하니 정말 최고였다.

traveler's coffee

들고 간 노트북을 펼쳐 나흘 간의 시베리안 횡단 후 도착할 모스크바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나처럼 노트북을 들고 온 몇몇의 서양 여행자들도 보였다. 그들을 보니 다시 생각 나는 중국인과 벤. 그들은 여전히 친한 사이로 시베리아 열차에서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을까. 보드카를 훌쩍이며 여자들을 꼬시고 있을까? 기차 침대에서 오줌까지 싼 벤은 중간에 기차에서 도망쳐 나오지 않았을까? 나였다면? 도망쳤을까?


내일부터 장장 삼일밤을 기차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되기에 먹을거리가 필요해 시내에서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어가 도시락면을 포함하여 나흘 치의 물과 간식 등을 구비했는데 역시 러시아의 물가가 악명 높음을 실감했다. 잠시 우울해진 기분을 돌리기 위해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서 한 짐을 들고 강가를 걸으며 먹었다. 원래 아이스크림은 추울 때 먹는 거라던 친구의 말처럼 아이스크림 맛은 첫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에 먹던 그 맛처럼 달콤함이 느껴졌다. 문득 한국의 친구들이 보고 싶다.

러시아의 아이스크림

아침이 밝자 다시 샤워장 열쇠를 받아 샤워를 하고 서둘러 아침을 먹었다. 아침식사는 방에서 혼자 어제 사온 빵과 물로 때웠다. 모스크바행 기차는 낮 기차였기에 여유가 있었지만 매번 기차를 탈 때마다 왜 그리 마음에 조바심이 생기는지. 짐을 싸고 풀고 다시 싸 보고 풀어보고. 혹시 잊은 물건은 없나 살펴보고 또 살펴봐도 언제나 잊고 나오는 물건이 왜 꼭 하나씩 있는지, 이를테면 폼 클렌싱 같은 세면도구를 나는 가장 많이 잊어버리고 챙기지 못하곤 했다. 칫솔은 챙기면서 왜 폼 클렌싱은 호텔마다 두고 나오는지, 한 번은 10일간의 길지도 않은 여행에서 폼 클렌싱을 3번이나 챙기는 것을 잊어버린 적도 있다. 호텔에 부탁한 택시를 타고 다시 크라스노야르스크 역으로 향했다. 몽골 여자애와는 몇 번의 이메일이 오 간 후에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다시 만나자로 인연이 끝났다. 오랜만에 집으로 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남편과 아직도 깨소금을 볶고 있는 신혼의 새댁은 나와 만날 핑곗거리를 찾지 못해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외출 허가를 받아낼 수 없었던 것 같다.



침대 네 칸이 한 캐빈 안으로 들어가는 쿠페가 아닌 이번에는 한 칸에 여러 침대가 들어선 칸으로 예약을 한 이유는 3등석 자리만 남아 있던 이 기차의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이 기차를 예약한 것을 기차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이 기차는 멀리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사흘간을 쉬지 않고 달려온 기차라 창문도 열리지 않는 그 안에는 사흘간 씻지 못한 러시아의 남자들의 땀냄새로 가득했고 그 안의 냄새는 정말이지 너무나 지독했다. 초겨울 같았던 전날의 날씨는 이상하게 초여름 같은 날씨로 변해 있어 그로 인해 냄새는 더욱 진동했다. 나는 바로 체해 버리고 말았고 내 침대에 짐만 나 두고 바로 기차와 기차 사이의 공간에 들어가 크게 공기를 들여 마셨다. 속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계속 메슥거리어서 아무래도 누워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자리로 돌아갔는데 내 침대에 침대 시트와 이블을 정리할 힘 조차 없어 눈물을 글썽이며 우두커니 서있었더니 옆 침대 아저씨가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바로 시트를 깔아주고 이불까지 펼쳐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할 틈도 없이 그렇게 몇 시간을 죽은 듯이 잤다. 다행히 속은 괜찮아졌고 이상하게 기차 안의 그 지독했던 냄새도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배가 고파서 바로 도시락면에 뜨거운 물을 받아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다 아까 대신 내 침대를 정리해준 아저씨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 실패했다. 소화를 시키기 위해 기차 칸을 이리저리 걸어 돌아다니다 나 말고 또 다른 동양 여자애가 보여 용기를 내 말을 걸어보니 모스크바에서 유학하고 있던 중국애. 여행하면서 익힌 간단한 중국어로 대화해 보니 인종차별이 심한 러시아에서 어떻게 친구도 없이 혼자 다니냐며 신기해했다. 기차가 중간에 설 때마다 역으로 나가 삼십 분간 돌아다니며 운동을 했고 때가 되면 밥을 챙겨 먹고 책을 보고 영화를 보고 그렇게 시간을 때우려고 노력했다. 2박 3일간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이 지루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암담했었다. 그래도 역시 시간은 흐르고 드디어 기차는 종착역인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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