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안 횡단 열차: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기대했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첫날밤은 악몽 같았다. 내 침대 위로 올려져 있었던 수많은 짐들. 그리고 아랫칸 침대에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거대한 몽골 남자가 있었다. 빡빡머리에 금시계를 차고 욕심 많은 돼지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짐을 빼 달라는 내 요청을 단칼에 무시했던 무례했던 그 자식. 러시아로 물건을 팔러 가는 몽골의 보따리 장수인 것 같았다. 내 침대 옆자리는 다행히 영어가 통하는 예쁘장한 몽골 여자애였다. 그 여자애의 침대에도 그 자식의 짐으로 가득 차 우리는 복도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었다. 굉장히 화가 났다. 60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산 쿠페의 내 위층 침대. 쿠페는 4개의 침대가 있는 케빈이 늘어선 기차로 2등 칸으로 규명되고 있는 고급이라면 고급 칸이었기 때문에. 몽골 여자애가 그 자식에게 짐을 치워달라고 했지만 여전히 미동도 없었던 그 자식. 그때 기차를 타기 전에 보았던 20대의 서양 남자와 영어가 유창한 동양인 남자애가 내 옆의 옆칸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도움을 요청해 볼까 하다 관두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승무원을 붙잡고 사정사정하니 드디어 짐을 하나 둘 빼기 시작한 그 자식. 알고 보니 그 짐들은 다른 몽골 보따리 상인들의 짐이었고 그 사람들이 타자마자 짐을 나눠 들고 각자의 방으로 가자마자 나는 내 침대 위로 나의 배낭을 던져 넣어 내 영역임을 표시했다
우선 화장실을 점검해 보았다. 좌변기가 있고 청결상태는 그리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중' 정도의, 그래도 여러 승객들이 많아 아주 편하게 사용 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론리플래닛을 보면 큰 생수통에 물을 가득 담아 '고양이 샤워'를 했다는 무용담도 있었지만 머리를 시원하게 감지 못하는 샤워는 하나마나 샤워일 것 같아 진작에 포기해 버렸다. 다시 캐빈으로 들어가 몽골 보따리장수 '그 자식'을 한 번 쫙 째려봐 주고 윗 침대칸으로 올라가 누웠다. 옆 침대의 몽골 여자애는 러시아 남자와 결혼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새댁이었다. 인종차별이 심한 러시아의 작은 도시에서 그 애는 러시아 남편과 그의 어머니에 둘러싸여 화초 같은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배우자 비자가 나오지 않아 3개월마다 비자 연장을 위해 몽골 울란바토르로 여행을 떠나야만 한다고 했다. 러시아 내에서는 남편과 시어머니 없이 혼자 돌아다닐 수가 없어 울란바토르의 비자 연장 여행이 싫지만은 않은 둣 했다. 그 애의 신혼집이 있는 목적지는 크야스노야르스크라는 소도시였고 그곳은 내 목적지인 이츠쿠르크에서 기차로 12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한숨 자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깨 보니 벌써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우리 캐빈으로 몽골 보따리장수들이 몰려와 술판을 벌리기 시작했고 그 자식 옆자리 침대칸 주인인 양반김처럼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검정 구두를 신은 몽골 여인이 신문지에 싸인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부스럭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건 엄청나게 긴 구운 말의 다리였다. 이 장면에서 나는 벌써 식욕을 잃어버렸다. 러시아 보드카를 마셔대며 말고기를 먹고 흥겹게 놀고 떠드는 그들의 모습이 신기해 아래를 쳐다 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말고기는 생긴 게 너무 끔찍했다. 나는 침대칸에서 내려와 복도에 우두커니 섰다.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지만 우리 칸의 탁자에는 이미 몽골 상인들로 가득했고 그렇다고 복도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무엇을 먹기란 좀 뻘쭘했다. 몽골 여자애는 피곤했는지 계속 잠을 잤고 사실 그 애에게는 말고기와 보트카가 흔한 풍경이지 않을까 싶었다.
창밖에는 러시아의 흔한 전나무 숲들이 지나갔다. 처음에는 예쁘다는 전나무숲은 6일 내내 계속되어 보기만 해도 지겹다는 그 악명의 러시아 풍경. 그래도 아직까지는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러시아 횡단 열차는 큰 도시에 도착하거나 하면 30분씩 역에서 정차했다. 용기를 내 기차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며 사람들도 구경했다. 작은 매점에서는 스낵이나 빵 음료수 그리고 반가운 도시락 면도 팔았다. 그런데 나에겐 러시아 루블이 없었다. 기차에 타서 현지인과 환전이 가능할 줄 알았는데 술판만 벌이고 있어 물어볼 대도 없었다. 다시 기차 안으로 들어가 몽골에서 사 온 맨 식빵에 물을 마셨다. 침대 아랫칸에서는 여전히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고 많은 몽골 상인들이 와서 술 한잔을 하고 가고 아주 난장판이었다. 게다가 그 몽골 자식이 내 손을 잡아끌고 술 한잔 하자고 하고 아주 짜증이 나서 시끄러워서 잠도 못 자고 그렇게 밤새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그래도 다행히 역시 시간은 흘러가고 다음 날 아침이 왔다. 밤새 술주정을 한 검정 구두의 여자는 새벽이 되자 술이 깼는지 나한테 영어로 쏘리쏘리라고 말하며 머쩍여했고 다행히 아침해가 뜨자 짐을 들고 내렸다. 그 자식을 포함한 다른 몽골 상인들과 함께! 나는 대충 세수를 하고 복도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랍 왕자님같이 생긴 영국 남자가 말을 걸었다. 몽골 기차역에서 기차표를 샀을 때 만났던 아랍 왕자님 같이 생긴 미남자가 친구와 함께 식당칸으로 아침을 먹으러 간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나는 루블이 하나도 없어. 유로뿐이야" 했더니 자기가 밥을 산다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자고 했지만 초면이라 미안해서 거절했다. 나중에 혹시나 유로를 쓸 수 있을까 해서 몽골 여자애를 깨워 옥스퍼드 대학교에 다닌다던 그 아랍왕자 같이 생긴 애가 아직도 있을까 하며 우리도 식당칸으로 갔다.
다행히 식당칸에서 환전이 가능해서 음식을 시켰는데 음식값이 어마어마해 우리가 시킨 것은 겨우 샐러드와 요거트 정도. 샐러드 하나로 둘이 나눠 먹고는 멀찍이 앉아 있던 아랍왕자 같이 생긴 영국 남자에게 Hi?라는 인사를 건네고 둘이 앉아 앞으로의 여정을 얘기해 보았다. 혼자 이츠크루크에 가려니 심심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약간 정이 든 몽골 여자애와 이대로 헤어지기도 아쉽고, 기차표를 다시 사서 자기 동네로 가자는 몽골 여자애의 의견에 찬성했다.
기차표를 사기 위해 더 많은 돈을 환전한 후 우리는 재빨리 자리로 돌아가 이르쿠츠크 역에 기차가 서자마자 뛰어나가서 그 애의 동네인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가는 기차표를 사버렸다. 이르쿠츠크 역에서의 정차 시간은 고작 15분. 혹시 기차가 우리를 역에 두고 떠나 버릴까 어찌나 가슴이 두근대고 불안하던지. 그렇게 나는 하룻밤을 기차에서 더 보내야만 할 처지가 되었고 우리는 새로 산 기차표를 보고 기쁜 마음에 크게 웃어대면서 다시 우리의 기차 칸으로 돌아왔다.
루블이 생겨 다음 도시에 기차가 오래 정차했을 때 도시락면을 사서 함께 점심을 때웠다. 오랜만에 뜨겁고 매콤한 한국의 맛이 나는 라면을 먹으니 기분도 좋아지고 뭔가 나른해지는 게 역시 다시 졸음이 몰려와서 낮잠을 자고 잠에서 깨면 영국 대학원을 위해 사온 전공서적도 읽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몽골 여자애와 서로 이메일을 교환하면서 만약 가능하면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시내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기로 계획을 세웠다. 다만 그 애의 남편과 엄마가 늘 그 애와 함께 동행하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서로 이메일로 연락하면서 시간을 맞춰보기로 했다. 몽골 여자애는 야크의 가죽으로 만든 열쇠고리를 주면서 오랫동안 연락하는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 열쇠고리를 숄더백에 달며 그러면 좋겠다! 생각했고... 론니 플래닛을 뒤지며 다음날 아침 일찍 도착할 크라스노야르스크의 호텔을 검색해 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다시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나는 운동삼아 쿠페의 복도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그때 ' 어디까지 가요?'라고 우리 옆 옆칸의, 울란바토르 역에서 살짝 보았던 유창한 영어의 동양 남자애가 말을 걸어왔다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애의 이름은 아마 스티브 혹은 마이클 같은 흔한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애와 함께 기차를 탄 영국 청년의 이름은 벤. 신기하게도 이 글을 쓰면서 방금 생각났다! 그 둘의 목적지는 모스크바. 그들은 장장 5일의 밤과 6일의 낮을 달려야만 할 시베리아 열차 여행이 자랑스러웠던 동시에 무척 지루해했던 것 같다. 외국인이라곤 우리 컨에 달랑 우리 세명. 보드카에 콜라를 섞어 함께 술을 마시자고 제안해서 난 몽골 여자애를 깨워 우리 넷은 복도에 앉아 보드카를 홀짝거렸다. 웨일스에서 왔다던 영국인 벤은 에어컨 때문에 추운 기차 안에서도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던 몸매 좋고 예쁘장한 몽골 여자애가 마음에 든 듯했다. 그 애의 영어실력을 칭찬하며 뭔가 조금 음흉한 분위기를 풍겼다. 술을 마구 마셔대면서. 미국에서 살지만 중국 출신이었던 동양애는 나와 얘기를 나눴지만 지금은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냥 술주정 이넜던 것 같다. 잔뜩 술에 취한 벤의 행동이 점점 무례해감을 느끼면서 나는 복도에서 일어나 세면대 앞으로 가 세수를 하고 잘 준비를 했다. 나를 따라온 중국 남자애는 좀 더 술을 마시고 놀고 싶다고 했지만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그렇게 흥청망청 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아무래도 벤의 행동거지가 뭔가 싸 보였다. 술 그만 마시고 자라고, 벤은 좋은 사람 같지 않다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하고 캐빈의 내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살짝 기분이 상했다던 몽골 여자애도 뒤따라 침대에 눕고 우린 다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 그 애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고 나는 뭐가 하고 싶다고 했더라?
어느덧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내려야 하니 잠을 잘 채비를 하고 침대에 누웠던 그 순간, 복도 밖에서 누군가 몽골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소리가 났다. 몽골인들의 목소리가 워낙에 커서 그냥 단순한 말다툼이겠거니 하고 자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밖의 소란이 오래가서 침대에서 내려와 복도 쪽을 바라보니 러시아 승무원이 벤과 중국애 방 쪽에 서서 큰소리로 야단을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글쎄...... 영국인 벤이 보드카 한 병을 순식간에 비우고서 침대에 누워 구토를 하고 오줌까지 쌌고는 곯아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키가 큰 러시아 여자 승무원 둘이 중국애에게 난장판인 방을 치우라고 명령했고 중국애는 캐빈에 쭈그리고 앉아 벤이 던져 놓은 피트 병들을 주섬주섬 줏었다. 러시아 승무원들은 벤의 꼴이 우스웠던지 그 캐빈 칸에 서서 한참을 웃어대면서도 중국애한테는 크게 화를 내며 네 친구가 더럽혀 놨으니 어서 깨끗하게 청소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중국애가 불쌍해서 비어있던 내 아랫칸 침대를 내주자고 그 옆칸에 누워있던 몽골 남자에게 사정했으나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저런 나쁜 애들과는 같은 캐빈에 누워있기 싫다며.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냥 모른 체 하고 침대에 누웠다. 다행히 중국애는 우리 옆칸의 빈 침대로 자리를 옮겼고 벤은 더러운 캐빈에 혼자 버려진지도 모르고 계속 잠을 잤다. 그렇게 그 밤은 지나갔고 드디어 목적지인 크라스노야르스크 역에 짐을 들고 몽골 여자애와 함께 내렸다. 그 후 중국애와 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나저나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아침은 너무나도 낯설다. 처음 밟아 본 러시아의 땅. 몽골에서 탄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많은 몽골 승객들로 인해 전혀 시베리아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는데... 새로운 나라의 땅을 밟았다는 설레임과 함께 앞으로의 러시아 여행에 온 몸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