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중국, 몽골까지 기어서: Feat 시베리아 횡단 열차
영국까지 갈 일이 생겼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1달.
그리고 인천에서 런던까지의 비행시간은 9시간 +
비행공포증을 갖고 있는 가련한 여행자로서 9시간의 비행은 무리라고 간주했다.
그래. 육로로 가보자.
9월의 런던 비행기 티켓은 100만 원가량. 이 돈에 한 달 반의 생활비를 포함한 영국까지의 육로 여행비를 대략 계산해 보니 150만 원가량의 돈이 들 거라고 예상했고 나는 육로로 영국까지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생소하게도 그때 나는 영국의 대학원 진학을 위해 영국을 가는 것이었다. 여행자가 아니라 유학생의 신분으로 가는 영국까지의 육로 여행은 뭔가 아주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9시간의 비행기 대신 5박 6일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포함한 1달 가량의 육로 여행을 택했다. 나는 9시간의 비행시간을 견뎌낼 자신이 없는 환자일 뿐이다 단정하며 영국까지 가기 위해 거쳐갈 중국, 몽골, 러시아의 비자를 받기 위해 각 국의 대사관 및 여행사를 방문했다. 영국 학생 비자는 이미 완료, 거금 10만 원을 주고 일주일을 기다려 여행사에 맡긴 러시아 비자를 받고 곧장 몽골 대사관으로 가서 비자를 신청했고, 몽골 비자를 받자마자 인천에서 중국 텐진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1년 반 가량의 영국 유학생활을 위한 짐을 몽땅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낡은 배낭에 구겨 넣은 채로, 그렇게 아주 가볍게 비겁하게.
8월29일, 인천에서 중국 텐진으로 가는 배는 식은 죽 먹기였다. 예전에도 2번이나 타봤기 때문에. 내내 베이징의 부잣집 거실에서 강아지가 뛰어노는 모습을 찍은 동영상을 보여주셨던, 내 아랫칸의 침대에서 주무신 아저씨는 늦게 일어나는 나를 의아하게 생각하셨다. "젊은 사람들은 원래 늦게 일어나지" 하시는 아저씨 부인의 말에 조금 안도하며 일부러 다시 눈을 감았다. 텐진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후 1시. 만약 내가 일찍 일어난다면 다시 그 아저씨의 가족자랑을 두 귀로 그리고 동영상으로까지 다시 확인해 줘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아침 7시에 다시 다시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 오전 11시쯤 되어 수건을 들고 배 안의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간단히 화장을 했다. 그렇게 하룻밤을 배 안에서 보내고 중국 텐진에 도착하여 선상비자를 받기 위해 줄을 섰다. 오? 영국 학생비자? 영국으로 가니? 하며 친절하게 20달러짜리 관광 비자를 내주던 텐진항의 이민국 아저씨. 덕분에 왠지 여행이 순조로울 것 같아 기분이 좋았었다. 우선 베이징으로 기차를 타고 가 베이징의 도미토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나 샤워를 한 후 짐을 챙겨 베이징에서 중국-몽골의 국경도시인 엘렌까지 가는 버스표를 예매하기 위해 북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침대버스표를 사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터미널 근처를 돌며 간식을 사고 버스 출발 한 시간 전에 다시 터미널로 가서 멍하니 앉아 있었더니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몽골 가요?" 알고 보니 한국에 1년 정도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몽골 소년. 몽골로 가는 버스가 꽉 차서 갑자기 다른 터미널로 가서 다른 버스를 타야 한다는 정보를 알려줘 다행히 몽골로 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밴을 타고 다른 터미널로 이동할 수 있었다. 새 시트를 깔아 놓은 침대버스는 참 잠자기 좋았다는 기억이 난다.
새벽같이 몽골 국경에 도착해 이번에는 울란바토르행 기차를 타기 위해서 몽골의 국경도시인 쟈밍우드까지 지프를 타고 갔다. 쟈밍우드에서 울란바토르까지 가는 기차는 저녁. 그 지프는 우리를 기차역 근처의 허름한 여인숙으로 데려다주었고 그 여인숙에서 다행히 울란바토르행 기차표를 대행해 주어 저녁나절까지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근처에 한국식당도 있어 버스에서 만난 한국 아저씨의 밥을 사준다는 초대도 거절하고 혼자 여인숙에 남았다. 다들 점심을 먹으러 나갔을 때 혼자 맘 편히 공동욕실에서 간단히라도 씻고 싶었던 까닭에. 9월의 한낮이었지만 쟈밍우드의 날씨는 서늘한 기운이 있어 결국 고작 고양이 세수만 하고 배고픔에 근처 상가를 걸어나가 간단히 빵만 사고는 한국 밥을 포기했던 것을 곧 후회하고 말았다.
몽골의 기차도 참 편안했던 기억이 난다. 아니면 내가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님 그때만 해도 가난한 배낭 여행자의 정신을 철저히 지키고 있어서 모든 것이 고생스럽지 않게 느껴진 건지. 저녁나절이 되어서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역 근처에서 간식을 사고 올라탄 기차는 곧 출발했다. 밤 12시까지 중국에서 버스에서 만났던 몽골 소년과 그 소년의 일행이었던 한국 아저씨까지 합세해 수다를 떨다 깜빡 잠에 들어 눈을 떠보니 벌써 도착할 시간이 다되었는지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드디어 울란바토르다!
울란바토르는 생각보다 심심했다. 서늘한 사막의 기운이 느꺼져서였을까, 아님 영국까지 갈 길이 막막하게 느껴서였을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9월의 추석 느낌의 날씨라고 하기엔 뭔가 따뜻한 느낌의 햇살이 부족했다. 몸을 떨며 서둘러 택시를 타고 론니플래닛에서 찍어둔 호스텔로 향했지만 도미토리는 이미 full. 다행히 두 번째로 찍어두었던 근처의 호스텔에 도미토리 침대 하나를 쓸 수 있었고 드디어 꿉꿉한 몸을 샤워로 시원하게 풀어줬다. 어제 울란바토르행 기차에서 밤새 수다를 떨었던 몽골 소년과 12시에 첫 번째로 점찍어 두었던 호스텔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샤워 후 급히 치장을 하고 그 호스텔 앞 골목에서 그 애를 기다렸다. 사실 우리가 아침 10시에 울란바토르 역에 도착했기 때문에 헤어진 지 2시간 후인 12시에 점심을 먹기 위해 만난다는 것은 조금 무리 같았다. 그래서 너무 일찍 만나는 거 아니야? 너도 집에 가면 목욕도 하고 인사도 하고 해야 할 텐데 라고 몇 번을 물었으나 그 애는 상관없다고 했다. 나한테 꼭 점심을 사고 싶다며. 그런데 이 녀석 나타나질 않는다. 다리가 아파서 30분을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다가 그냥 혼자 점심을 먹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아니, 사실 떠났던 그 골목에 다시 되돌아와서 10분 정도를 더 기다렸다. 그래도 그 애는 나타나질 않았다. 나중에 영국에 도착한 후 싸이월드로 얘기를 나눠보니 1시간 정도 늦게 약속 장소로 왔었다고 한다. 내가 보이질 않아서 근처 호스텔을 다 돌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며 아쉬웠다고. 나도 아쉬웠다. 왜냐면 울란바토르에서 러시아 시베리아 열차를 타기 위해 기다린 3일 동안은 너무 심심하고 외롭고 또 춥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근처 카페에서 혼자 밥을 먹고 기차역으로 다시 돌아가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 기차표를 샀다. 만약 기차표를 러시아의 모스크바까지 한 번도 서지 않고 가는 여정으로 산다면 200달러 정도로 가장 싼 기차표를 살 수 있었다. 아니면 중간에 이츠쿠르크 같은 유명한 도시에 멈춰서 하루 쉬고 다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면 가격이 좀 더 비싸진다. 아무래도 6일 동안 샤워를 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일단 바이칼 호를 보기 위해 이츠쿠르크까지 가는 표를 60달러 주고 구입. 2등석인 쿠페의 위층 침대를 구입했다. 일단 기차에서 하룻밤만 보내고 이츠쿠르크에서 내려 하루 이틀을 보내고 나머지 여정은 그곳에서 결정하기로 맘을 먹었다.
앞으로 탈 시베리안 횡단 열차의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왠지 울란바토르 시내의 밤공기가 싫었다. 멀리 여행을 떠나야만 하는 비행공포증까지 있는 환자 여행자를 품어줄 따뜻한 공기가 있는 곳을 어딜까. 이제 곧 정이 많은 아시아를 떠나 러시아로, 유럽으로 가야 했던 나는 울란바토르의 너무나도 건조한 공기가 싫었던 것 같다. 너무 메말랐다 느꼈다. 그나마 다행히도 5000원가량이면 먹을 수 있는 한식당은 주변에 널려 있었다. 몽골까지 와서 무슨 한식이냐 하면서 뻘쭘하게 한식당을 찾아 순두부찌개를 먹던 나 자신이 한심했지만 추후에 그 음식들은 러시아 여행에서 쌀을 찾아 먹을 수 없었던 나에게는 보약과도 같은 역할을 해 주었던 것 같다.
밤 10시 즈음, 호스텔에서 만난 이태원에서 일하며 살고 있다는 캐나다 신문기자 청년과 간단히 밤 산책을 나갔다 들어온 호스텔 거실에서는 온갖 도시에서 온 서양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양인이라고는 나 혼자. 싫었다. 괜히 혼자 인종차별을 당할 거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황급히 방으로 올라왔더니 창밖에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건지 아니면 놀리려고 하는 건지. 나는 그때 러시아에서 당할지도 모를 그러나 너무나도 다행히도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인종차별에 겁을 먹고 있었나 보다, 아마도.
내가 예약한 기차는 이틀 후에나 탈 수 있었기에 이튿날 부터는 울란바토르 시내를 혼자 돌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낮의 햇살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Gandentegchenling Monastry부터 찾아가 보았다.
티베트의 불교도 몽골에서 전수되었다고 하니 몽골의 사원에서 티베트의 향기가 났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었던 티베트의 문화를 다시 느낄 수 있어 참 반가웠다. 예전에 동티베트에서 만나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웃음을 터뜨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함께 마을을 쏘다녔던 어린 스님 친구들의 모습을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아련한 마음을 한 채 사원을 돌았다.
마침 마니차가 늘어선 코라(Kora)도 만날 수 있어서 코라를 돌며 앞으로의 무사 여행을 위해 그리고 영국대학원에서의 학업과 미래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이 사원의 코라는 생각보다 길었다. 전체 사원의 모퉁이에 쭉 연결되어서 중앙 쪽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사원의 전경을 볼 수 있어서 왠지 모를 성취감까지 주었다.
만약 내 뒤에 나이 드신 노인분들이 따라오시면 더 힘차게 마니차를 돌렸다. 그러면 내가 돌린 마니차가 그분들이 그 마니차 앞에 도달하실 때까지 회전하고 있어 그분들은 마니차를 돌리기 위해 따로 힘을 쏟을 필요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은 선행이라도 언젠가 나에게 행운이 되어 날아왔으면 하고 나는 다시 이기적인 선행을 베풀었다.
좁은 울란바토르 시내는 전날 함께 밤 산책을 한 캐나다 청년과 만나 저녁을 먹게 해줬다. 몽골의 정치 관련 리포트를 신문사에 기고하기 위해 5일째 정보를 구하며 울란바토르에 머물고 있는,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고 얼굴만 희미하게 기억나는 눈이 파래서 이뻤던 캐나다 청년은 저녁을 먹으러 가는 나를 발견하고 졸졸 따라왔다.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은 어떠냐며. 그 당시만 해도, 사실은 지금까지도 결정장애가 있는 나는 왜 자신이 먹을 저녁 메뉴를 결정하기 어려워하냐며 핀잔을 주던 그 캐나다 청년이 바로 불편해졌다. 그 청년을 따라 시킨 튀긴 치킨 다리가 올려진 볶음밥은 정말 맛까지 없었다. 예쁜 파란 눈의 서양 남자 앞에서 닭다리를 뜯어야 하는 불편함까지 플러스되어 나는 그날 저녁 이후로 그 청년을 피해 다녔다. 조용한 카페를 찾아 Trans Siberian 론리플래닛을 뒤적이며 혼자 밥을 먹고 답답해지면 울란바토르 광장을 하염없이 돌고 또 돌며 시간을 보냈다. 대학원 학비와 생활비의 압박 때문에 그토록 별이 아름답다는 고비 사막은 꿈도 꿀 수 없고 그렇게 혼자 보낸 울란바토르는 아직도 나에게 쓸쓸한 기억을 준다. 울란바토르에서의 지루한 시간보다 기차 안의 지루함이 훨씬 더 편안할 것만 같았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들 중 나를 제외한 유일한 동양인의 모습이 보였다. 20대 서양 남자와 함께 여행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영어가 유창한 국적 모를 20대의 동양 남자애.
그리고 드디어 나는 시베리안 횡단 열차에 올랐다.
이어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