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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ngry Traveller Sep 13. 2017

아날로그적 여행의 기억

세계 각국 친절한 여행자 씨

친절한 여행자 씨의 아날로그적 리뷰

이번에 내가 투숙한 호텔에 체크인을 할 때 발견했던 멀리 스페인에서 날아온 엽서 한 장.

스페인 여행자가 호텔에 보낸 감사 엽서

이 호텔에 투숙했었던 스페인 여행자가 고향에 도착한 후 호텔로 직접 보낸 감사 엽서였다. 나는 이 스페인 여행자의 엽서 한 장 덕분에 이 호텔을 완전히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정말 편하게 잠을 잔 것 같다. 사실 그동안 며칠 동안 호텔 방이 마음에 들지 않고 불편해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이 날은 바퀴벌레가 있는 방에서 이틀이나 보내고 조금 돈을 더 얹어 새 호텔을 선택했던 날이었다. 그리고 이 스페인 여행자가 호텔에 보낸 감사 엽서 덕분에 문득 옛날 생각에 젖고 말았다. 예전에 아날로그적으로 여행했던 순간들이.

여행서적의 바이블이라고 불렸던 론니플래닛

그런 시절이 있었다. 여행 서적의 바이블이라는 영문판 론니플래닛을 뒤적이며 추천된 숙소를 찾아 찜 한 후 책자에 있는 조그마한 지도를 보고 숙소를 향해 걷고 또 걸었던 때가. 물론 소수의 한국 배낭 여행자들이 이미 블로그에 여행 정보를 적어 놓기도 했지만 왠지 그들의 정보만을 믿기가 어려웠다. 그때만 해도 한국인들이 이렇게 많이 여행을 다니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정보만을 믿고 숙소를 찾았다가 낭패를 당했던 적이 몇 번 있었기에 한국 블로거들의 정보를 믿기보다는 론니플래닛에 의지하며 숙소를 고르고 레스토랑을 선택하고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숙소까지 가는 정보를 찾아 여행서적에 머리를 박고 걷곤 했다.

남인도의 버스

여행 서적을 보며 걸으면 드디어 여행자가 도착했다고 생각하며 릭샤나 택시 운전사들이 여행자를 에워싸고 가격 흥정을 시작했던 시절. 그런 때가 문득 그리워지고 말았다.

여행자들의 리뷰를 붙여놓은 호스텔

푼돈이라도 아끼느라 몰려드는 릭샤나 택시들을 피해 걷고 걸어 힘들게 숙소에 도착해 보면 숙소를 칭찬하는 따뜻한 메모들이 가득 붙어 있곤 했다. 물론 자국어로 안 좋은 리뷰를 적어 놓은 여행자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론니플래닛 추천 호텔에 오길 잘 했어, 다행이야. 믿을 수 있는 숙소구나. 오늘 밤을 편하게 지낼 수 있겠지?' 하면서 짐을 풀곤 했었다.

중국 쏭판 에미 게스트 하우스 룸

그리고 방은 정말 맘에 쏙 들었다. 그 당시 묵었던 숙소는 대부분 도미토리룸의 침대 하나였지만 도미토리가 없는 지역에서는 운 좋게 싼값으로 싱글룸을 구할 수도 있었다. 색색이 커튼을 닫으면 방에 조명이 따로 필요 없었을 정도로 은은하고 아름다웠던 방도 만난 적이 있다. 방에 미니 스탠드가 있어서 이건 무엇일까 했다가 한 밤에 갑자기 정전이 되는 바람에 아 그래서 방에 미니 스탠드가 있었구나 하고 깨닫기도 했다.

중국 쏭판 에미 게스트 하우스에서 발견한 한국 여행자의 메모

가끔 한국 여행자가 남긴 발자취도 볼 수가 있었다. 반가웠다. 특히 흔한 여행지가 아닌 조금 깊숙이 들어가 조금 두려움이 느껴질 때면 더더욱.

자기 나라의 국기를 그려 붙인 모습이 재미있었다. 밤에 딱히 할 일이 없던 곳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많은 여행자들이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벽에 덕지덕지 붙여줄 정도로 이곳이 좋았던지.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의 친절한 흔적이 참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어느 여행자는 긴 여행 끝에 집에 도착하고 난 후에 호텔로 고맙다는 인사로 친절히 엽서까지 보내주고 이건 정말 믿어지지 않는 얘기인 것만 같다. 인터넷 호텔 예약 사이트에 좋은 리뷰를 남겨두면 될 시대에 이렇게 아날로그적으로 엽서를 보내주는 친절한 여행자가 있다는 사실이.

트레킹을 하자고 졸라대던 흥몽족 여인의 번호

베트남 산골마을인 사파의 길을 거닐면 흥 몽족 여인들이 트레킹을 가자고 졸라대곤 한다. 오늘 아침은 줄리라는 흥몽족 여자가 나에게 트래킹을 가자며 끈질기게 졸라댔다. 그래도 내가 시큰둥하자 작은 수첩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그 수첩에는 줄리와 함께 한 트래킹이 너무 좋았다는 리뷰가 쓰여 있었다. 각국의 언어로. 아직 리뷰가 3장 밖에는 안됐지만 그래도 그 리뷰를 보니 왠지 줄리가 믿음직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만약 트래킹을 가면 줄리랑 같이 가겠다고 말해 버려고 말았다. 줄리는 나에게 끈 팔지를 공짜로 하나 주겠다고 까지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만약 내가 트래킹을 너와 함께 가면 그때 공짜로 꼭 달라고 하고. 혹시나 내가 길가를 걸을 때 다시 줄리가 나를 쫓아와서 트래킹을 가자고 졸라대면 어쩌나 했는데 이상하게 줄리가 보이 지를 않았다. 만약 또 가자고, 가자고 졸랐다면 아마 갔을 텐데. 줄리 덕분에 내 생애 처음으로 트래킹이라는 것도 해 봤을 텐데. 오늘은 줄리를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직접 전화를 걸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우연히 고전적으로 길가에서 마주치기를 기대하면서.

여행지를 거닐다 보면 아직도 아날로그적인 여행자들의 흔적들이 많이 발견된다. 특히 창가에 붙여놓은 여행자들의 리뷰가 그렇다. 예전에 네팔 카트만두에서 한국 여행자들이 로컬 식당의 맛이 너무 좋고 친절하여 아예 한국어로 된 간판을 만들어 주고 한국어로 된 메뉴까지 만들어 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아마 그런 아날로그적인 친절한 여행자들의 시초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식당의 가득한 리뷰들

물론 여행지까지 가서 한국어로 된 메뉴판이 있는 식당에 가고 싶지 않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사실은 나도 그들과 한패지만 그래도 친절한 여행자들의 흔적은 늘 무언가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다고 생각된다.


여행지의 책 첫 장의 아름다운 흔적

인도에서는 책 첫 장의 아름다운 흔적들을 발견해 본 적이 있다. 전자책이라는 개념도 없었던 그 시절. 가끔 헌책방에서 영문으로 된 책을 사보기도 했지만 늘 첫 페이지를 읽다가 말고 다시 되팔거나 혹은 호스텔에 버리고 오기 일수였다. 겨우 저녁 7시가 되어 들어 선 호텔. 차를 한잔 마시면서 무슨 책이 있나 식당에 모아 놓은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한국 책 2권이 있었다. 오랜만에 본 한국 책, 그 책은 내가 열 번도 더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끼의 ‘상실의 시대’와 ‘좋은 시’라는 시들을 모은 시집이었다. 심심 한터라 오랜만에 잡은 한국 책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전에 몇 번이고 읽었던 책이라 반쯤부터 대충 잡아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책 뒷페이지 부분이 왕창 떨어져 흘러내렸다.

그 페이지들을 주섬주섬 줍는데 책 표지에 이상한 마크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경기도립 과천 도서과’의 바코드였다. 아… 누군가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반납하지 않고 그대로 들고 나온 책인가 보다… 과천에서 멀리 인도까지 온 책이군… 왠지 흥미가 당겨 책의 첫 장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깨알 같은 글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른 댓글......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또 하나의 댓글. 그들은 후에 다시 이 글을 확인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뒤에 계속 꼬리말이 이어진다면 얼마나 재미있고 아름다운 댓글들로 탄생할까... 이제 그만 내 차례가 되어버렸다… 나는 과연 뭐라고 적어야 할까…그래.. 나도 다시 이 글을 확인하고 싶어 지겠지 하면서… 전에도 이런 낙서들이 적힌 책들을 여행지에서 발견한 적이 있었다. 혼자 스리랑카의 캔디라는 작은 도시에 간 적이 있었는데 가난한 여행자였던 나에게 머물 수 있는 곳이라고는 그저 미얀마의 작은 절이었다. 하루 500원 정도의 방세를 지불했었나… 미얀마 스님이 모아두었던 여러 여행자들이 남기고 갔던 책들. 그중에 한국 책이 하나 껴 있었는데 그것은 ‘전태일 평전’이었다. 첫 장에 적혀 있던 글들. 내용인 즉 헌책방을 돌다가 발견한 전태일 평전을 읽은 고마운 마음 뭐 그런 것이었다.


하릴없이 3일이나 묵었던 그곳에서 나의 유일한 즐거움은 바로 그 낙서들을 읽고 또 읽어 보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잡은 전태일 평전은 단숨에 읽어 버렸고 그리고 며칠 동안 괜히 그 책 첫 장에 적혀 있던 낙서들을 읽고 또 읽어 봤었다. 왜 그땐 나도 뭔가 조금이라도 댓글 낙서를 남기지 않았을까. 드디어 댓글이 없던 책인 ‘좋은 시’의 첫 장에 첫 낙서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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