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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ngry Traveller Oct 11. 2017

창문 없는 방

호텔과 여행의 상관관계

누구나 여행을 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두는 것은 제각각이다. 배낭을 메고 도미토리만을 고집하고 그날그날의 가계부를 작성하며 알뜰하게 여행을 했던 시기에, 그 당시 인도와 태국 등지를 지배했던 다른 많은 서양 배낭여행자들처럼 나도 잠자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하룻밤 어디든 여행에 지친 이 몽뚱아리를 뉘일 곳만 있으면, 그리고 그다음 날에 비교적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다면 어떤 방이든 크게 개의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여러 서양 여행자들처럼 먹는 것에 그렇게 치중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싸게 자고 싸게 먹으며 별생각 없이 싸돌아 다니다가 쉬고 싶은 곳을 발견하면 장기체류를 하던 그런 부류의 소박한 여행자였다. 다행히도 크게 식탐이 없었고 싼 물가의 나라만을 돌던 그때 비싼 음식을 먹는 것은 너무나도 큰 사치 같았기에 자제한 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현재, 어느덧 그때보다 부쩍 늙어버린 나는 호스텔 보다 호텔을 선호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외국에서 일을 하며 지낼 때는 따로 방을 구해 살면서 가끔 여행할 때만 호텔을 구해 잠을 잤기 때문에 호텔 가격을 아주 싸게 잡지 않아도 되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시작될 프로젝트를 기다리며 베트남 등지를 떠도는 시기에는 숙소 가격을 싸게 잡을 수 밖에는 없는 처지였다. 그래도 이젠 선호하는 숙소가 호스텔에서 호텔로 바뀌었으며 되도록이면 발코니가 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싶었다. 1년 365일 내내 여행 성수기라고 해도 될 만큼 바쁜 베트남의 하노이에서는 호텔 내 장기체류가 쉽지만은 않았는데 며칠을 호텔에서 묵고 나면 이미 방이 Full인 날짜가 다가와서 다시 호텔을 옮기고 옮기고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호텔을 옮기다가 바퀴벌레 호텔을 만나기도 했고 몸이 너무 피곤할 때는 평소보다 아주 조금 비싼 호텔에서도 자보기도 했고 정말 근 2달 새에 하노이에서 많은 호텔을 옮겨 다닌 것 같다. 그렇게 옮겨 다니면서 내가 다시 내린 결론은 여행에서 잠자리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 잠자리가 불편하다 보면, 예를 들어 벌레가 득실거리거나 혹은 그렇게 생겨서 불안 한 곳에서 잠을 설치다 보면 다음 날의 일정이 정말 망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는 백수 신세로 매일매일의 일정이 불확실한 것도 사실이지만 백수에게도 나름대로 만든 어쩌면 규칙이라고 하면 규칙일 수 있는 매일의 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나는 지금쯤 중국 비자를 신청해 놓고 느긋하게 비자를 기다리고 마지막 하노이의 밤을 즐기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대사관에서 아무런 공지도 없이 여행자 비자 발급을 잠시 중단하는 바람에 하노이 체류가 뜻하지 않게 길어져 순식간에 다시 싼 호텔을 찾아 떠도는 신세로 돌변해 버렸다. 유명 호텔 사이트를 뒤져서 그렇게 겨우 찾아간 어느 호스텔. 그때는 이미 오전 11시가 지난 후였다. 그래도 싼 값에 좋은 호텔을 찾았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카페에서 나와 무거운 짐을 들고 호텔까지 걸어서 걸어서 그렇게 도착했는데...... 빨리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겠다는 기대는 호텔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졌다.

하노이의 어느 호텔 입구

그래도 설마 하면서 호텔까지 가는 기나긴 터널 같은 입구를 통과해 구불구불 미로 같은 어두운 동굴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런 노래가 내 머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 늘 슬픔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그래도 방은 괜찮을 거야 위로하며 드디어 체크인을 하고 방문을 여는 순간 오늘 밤은 여기서 잘 수 없겠구나 했다. 일단 짐을 방에 놓고 나와 다시 길을 나서면서 나는 이날 새벽부터 현재까지 하노이의 길거리를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가련한 오전 일상으로 기억의 테이프를 돌렸다.



 나는 바로 전날 베트남 중부 훼 지역에서 하노이로 출발하는 낮 3:30분 기차를 타고 정확히 13시간 20분 만인 새벽 4시 50분에 하노이 기차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자는 잠은 아무리 잘 잤다고 자부한다고 해도 다음 날이면 정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몸이 뻐근하고 피곤하다. 아무튼 그런 몽롱한 상태로 나는 하노이 역 앞의 시멘트 계단에 다른 서양 여행자들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그렇게 30분을 역 앞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날이 채 밝지도 않았는데 겁도 없이 하노이 역을 떠나 여행자 거리가 있는 호안끼엠 호수 주변으로 걸었다. 그렇게 20분쯤 어두운 길을 혼자 걷다 보니 아침 운동에 빠진 하노이안들이 보이고 나는 그들과 함께 천천히 호수를 걸었다.

 40분 정도를 강제로 호수 주변을 산책한 후 아침 7시에 문을 여는 스타벅스로 들어가 1시간 정도를 쉬었다. 일주일 간의 긴 추석 연휴로 인해 문을 닫아버린 중국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시간을 때워야만 했다. 중국 대사관은 아침 8시 30분에 업무를 시작하기 때문에 스타벅스에서 8시경에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드디어 중국 대사관에 도착했더니 기나긴 대기 줄이 눈앞에 들어왔다. 중국대사관에서는 현재 베트남 내에서 워크퍼밋이 없는 일반 여행자에게 비자 발급을 중단했다고 했다고 했다. 문제는 그런 말을 진작 해주지 않고 계속 여행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신청서를 작성하고, 경비원에게 모든 서류를 검사받고 드디어 비자를 신청하려 했더니 갑자기 안된다며 돌려보냈다는 점이었다. 중국대사관에서 대기시간을 포함해 접수창구 입구까지 도달하기까지 2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 점이 무척이나 한심스럽고 억울했다. 게다가 나한테는 여행자 비자발급이 언제 시작될지 모른다고 했으면서 다른 서양 여행자한테는 다음 주에 발급이 가능할 것이라고 하고,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경험에 갑자기 피곤이 미치도록 밀려왔다. 택시를 탈까 하다가 어차피 호스텔 체크인 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서 다시 여행자 거리 쪽으로 걷다가 그전에 묵었던 호텔에 맡겨 놓았던 짐을 찾아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바나나 셰이크를 마시며 호텔 사이트를 뒤져 겨우 찾아낸 저렴한 호스텔이었는데. 그 호스텔에서 보여준 방은 더 가관이었다. 현재가 2017년이 맞나 아니면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서 1970년대로 돌아간 건지 아주 고풍스러운 가구들로 가득 차 있던 그 방의 벽과 천장 사이는 곰팡이로 둘러쳐 저 있어서 난 오늘 이 방에서 잠을 잘 수도 그렇다고 밤을 새울 수도 없을 거란 예감에 그냥 다시 짐을 들고 호스텔 카운테로 내려와 버렸다. 내가 예약한 방은 저 방이 아닌 것 같다고, 나는 더블룸을 예약했는데 트윈룸이라고 했더니 좀 더 체크인을 일찍 해주려고 했다면서 오후에 다시 오면 좋은 방으로 바꿔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그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낼 자신이 없었다.


오랜 호텔 생활로 내가 어떤 호텔에서 잠을 잘 수 있을지 없을지를, 이젠 나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한 밤에 호텔에서 벌레를 보고 달아나기보다는 그냥 숙박비를 버리는 쪽을 택하는 편이 나을 듯하였다. 일단 오후 1시에 잡힌 현지 업무 미팅을 들어간 후 근처의 대형슈퍼로 들어가 간식거리도 사고 생각 외로 지출이 많아진 오늘을 반성하면서 나는 3000원가량 드는 택시 대신 350원을 주고 버스를 타고 다시 여행자 거리로 갔다.

한국의 중고버스를 개조해서 만든 하노이 시내버스

여행자 거리에 도착한 후에 다시 근처 카페로 들어가 바나나 셰이크를 마시며 급하게 여러 호텔들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값이 비슷하면서도 발코니까지 딸린 다른 호스텔을 예약하는데 성공. 다시 짐을 찾으러 처음 그 호스텔로 돌아갔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역시나 캔슬이 안된다고 하여 이미 지불한 방값을 버리고 되어 속이 상했지만 나 역시 미안한 마음에 "I'm sorry, too"라고 하며 손을 흔들고 나와 추석 추석 내리는 비를 맞으며 다시 가방을 들고 새로운 보금자리로 향했다. 

바나나 쉐이크를 마시며 다시 호텔방을 찾기 시작했다

달려드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900미터를 걸어 새로 예약한 호스텔에 도착했지만 내가 예약한 발코니 룸이 없다며 sister 호스텔로 옮기자며 나를 설득했다. 처음에는 많이 화가 나서 호스텔 측에 생떼 아닌 생떼도 부려봤지만 역시 수가 없어서 나는 호스텔 직원을 따라 sister 호스텔로 걸었다. 그런데 도착해서 하는 말이 오늘은 발코니 룸이 없으니 그냥 하루 다른 방에서 자고 내일 발코니 룸으로 옮겨 주겠으며 오늘 밤은 특별히 가격을 할인해 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힘들었던 하루 때문이었을까, 뭔가 크나큰 배신감이 들었지만 비가 쏟아져 내리는 어두운 거리와 방값을 할인해 주겠다는 말에 맘이 동해 그만 OK를 해버리고 그 직원은 나를 남겨두고 sister 호스텔을 떠났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창문 없는 방
창문 없는 방. 나는 네가 미웠다.

호스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그 방은 무언가 어색했다. 불을 켰지만 여전히 컴컴했고 어딘가 허전했다.

"It's a fake window."

직원이 묻지도 않는 얄궂은 대답을 했다. 그랬다.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하노이처럼 호텔이 밀집한 지역에는 사실 창문이 없는 호텔은 많이 있다. 창문이 없는 방에서 자본 적도 있었기 때문에 호텔을 고를 때 늘 창문의 유무부터 확인하곤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아무런 각오도 없이 창문이 없는 방을 만날 줄은 사실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냥 창문도 아닌 발코니가 딸린 방을 준다고 해놓고 어떻게 눈도 깜빡하지 않고 창문이 없는 방을 줄 수가 있는지. 사실 창문 없는 방은 그러려니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뭔가 얄밉게 보이는 창문의 그림이 너무나도 야속했다. 차라리 저 창문을 그리지나 말지. 저 창문 그림이 오늘의 나의 처지를 놀리는 것 마냥 보였다.

창문 없는 방을 취소할까 말까 고민하면서 마신 아보카도 스무디

하루 종일 너무 고생스러웠고 이미 돈을 지불한 호스텔 방까지 버리고 온터라 나는 나도 모르게 갑자기 울컥했다. 그리고 슬픈 영화를 본 것도 아닌데 갑자기 눈이 따갑기 시작하더니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것이었다. 웬만한 슬픈 영화가 아니고서는 눈물이 흐르지도 않는데 이렇게 갑자기 눈과 마음을 함께 정화시켜준다는 눈물이 덜컥 찾아오더니. 호스텔 직원은 나의 기분을 느꼈는지 만약 원하면 방을 취소해도 된다며  이유 모를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는 몇 분의 여유를 달라고 하고서 일단 가방을 방에 두고 나와 호스텔이 운영하는 카페에 앉아 아보카도 스무디를 시켰다. 우울한 마음을 아보카도로 달래며 나는 괜히 호텔 사이트를 뒤져보았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이제 다시 호텔을 찾아 무거운 가방을 질머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호텔 직원은 나에게 생수를 하나 서비스를 주며 내일은 꼭 발코니가 딸린 방을 주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너무나 얄미웠던 창문 그림

다시 방에 들어서니 나를 맞이하는 창문 그림. 사실 창문의 그림이 있으니 창문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묘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역시나 창문이 없으니 무언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창문이 없으니 벌레가 들어올 구멍은 없을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일단 샤워를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러다 혹시 스탠드를 켜면 방이 더 아늑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스탠드를 켰더니 아늑해진 창문 없는 방

약간 방이 아늑해지면서 편안한 마음이 들어 이어폰을 귀에 뽑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니 갑자기 Amy Winehouse의 "You know I'm no good"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렇게 창문 없는 방과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고생했는 나 자신과 어울리는 노래인지 참 그 기막힌 우연이 신기했던 밤. 나는 그날 창문 그림이 있던 창문 없던 방에서 하룻밤을 무사히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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