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치료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갔을 때 '명사 특강'이 열린다는 포스터를 보았다. 외화 번역가 이미도씨가 학교에 와서 강연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일을 할 때 동기부여가 꼭 필요하고, 쉽게 감화되는 스타일인 나는 이런 종류의 특강을 빼놓지 않고 들었다. 책과 화면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에너지가 현장에는 존재했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강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남아있는 건 이 사인. 강연이 끝나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줄 서서 받은 친필 사인이었다.
이름을 물어보고, 날짜를 쓰고, 평범하게 사인을 해주실 줄 알았는데, 영어로 꽤 길게 무언가를 적으셨다. 앞 뒤로 늘어선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한 명 한 명 정성껏 글자를 쓰셨다. 푸른색 유성펜으로 쓴 꼬불 꼬불한 글자들은 마치 헤엄치는 고래 같았다.
행여 구겨질세라 들고 다니던 파일 케이스에 넣어 소중히 끌어안고 버스를 탔다. 그리고 종이를 꺼내 찬찬히 읽어보았다.
"May your future be like a movie you'd want to see again."
"당신의 미래가 다시 보고 싶은 한 편의 영화와 같기를."
뭉클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인이 또 있을까?
내가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결말'에 있었다. 감독, 주인공, 줄거리 보다도 결국에 해피엔딩인지 아닌지가 제일 중요했다. 슬픈 결말이나 열린 결말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덕분에 끝이 산뜻한 애니메이션이나 로맨틱 코미디를 즐겨 보게 되었다. 만화 속 주인공들은 한 때 시련을 겪지만 결국 온갖 어려움을 다 이겨내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묘하게 차오르는 대리만족에 입꼬리가 올라갔고, 일말의 찝찝함 없이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당신의 인생은 다시 보고 싶은 영화인가?'라고 묻는다면, 사실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이제 고작 삶의 전반전을 살았고, 어마어마한 악의 세력(?)에 맞서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다. 초반에 다소 빠른 전개로 공포, 스릴러를 넘어 장렬한 전투씬마저 치렀다면, 후반전에는 유머와 사랑이 폭발하는 반전이 예고되어 있다. 영상미는 또 얼마나 뛰어난지. 안 보면 후회할 듯!
모든 일은 끝이 가장 중요하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먼 훗날 내 인생의 엔딩 크레딧을 올리며"멋지게 잘 살았다고. 버텨줘서 고맙다."라고 손뼉 치고 있는모습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