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쓰는 다이어리에는 그날 해야 할 일, 그 해 이루고 싶은 목표 그리고 살면서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곤 한다. 작은 소망들을 하나 둘 이루어가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조금씩 달라지는 목록이지만 굳건히 리스트를 차지하고 있는 숙원사업들이 있다.
이것들을 내 인생의 <버킷 리스트>라 부르기로 했다.
1. 영국 문학기행
영국 문학기행은 스무 살 때부터 꿈꿔온 로망이다. 첫 치료 기간 중 다양한 책과 영화들을 섭렵했는데, <미스 포터>라는 영화 속에 등장한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풍경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내가 꿈꾸던 지상의 '천국'같은 느낌이랄까. 이곳은 귀여운 토끼 캐릭터 '피터래빗'의 고향이자 윌리엄 워즈워스, 콜리지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에게 큰 영감을 준 곳이기도 하다. 여러 예술가들이 이곳의 자연에 반해 작품 활동을 했으며 특히 워즈워스의 대표작인 '수선화 (Daffodils)'는 그가 레이크 디스트릭트 호숫가에 만개한 수선화를 감상하며 쓴 작품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셰익스피어의 탄생지인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제인 오스틴의 생애를 느낄 수 있는 바스, 찰스 디킨스 박물관,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이 있는 몽크스 하우스, 소설 '테스'의 작가 토머스 하디의 흔적이 남아있는 도싯, '제인 에어'의 배경이 된 요크셔 지방과 조앤 K 롤링이 사랑한 마법의 도시 에든버러까지... 꼭 런던이 아니더라도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은 영국의 소도시 여행을 하는 재미가 클 것 같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관련기사들을 스크랩을 하고, 정성 들여 문학기행을 준비했지만 출국을 앞두고 다시 병원신세를 지게 되면서 전부 무산되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언제든 떠날 준비는 되어있다. 이제 짝꿍도 생겼으니 남편과 함께 영국의 아름다운 시골길을 거닐며 내가 사랑하는 문학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탄생한 곳의 정취를 진하게 느껴보고 싶다.
2. 책 출판: 따뜻하고 사람 냄새나는 글 쓰기
글을 쓰는 일은 나의 유일한 특기로, 좋아하는 일이 업(業)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꿋꿋이 취미로만 남겨두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더 좋아하려면계속해서 그 일을 해야 하니 하나의 책으로 엮는것이 제일 의미 있을 것 같다. 다른 친구들이 겪지 않은 일들을 겪으며 느낀 단상과 소회, 아픈 몸을 살면서 바라본 삶에 대한 시선 등 있는 그대로의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고 싶다.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병을 겪지 않았을 텐데, 나의 이야기에 누가 귀를 기울여줄까?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지만 살면서 누구나 한 번은 시련을 겪고, 방황하는 순간이 오며 이겨내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 나의 글이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된다면 좋겠다.
3. 건강하고 씩씩한 엄마 되기
결혼 후 비교적 최근에 추가된 내용으로 그동안 나의 삶을 돌아봤을 때결혼, 임신, 육아 등을 꿈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격정적이고 다이내믹한 시간들을 보내는 동안 지인들은 모두 결혼을 했고, 엄마가 되었다. 모든 것이 시간이 흐르며 순리대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 자연의 섭리와 생의 순리에서나는 늘 벗어나 있었기에 어느순간부터는 아예 세계관을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과 저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다른 곳이라고. 나의 세계에서는 원래 없는 일이니 안된다고, 어렵다고 슬퍼하지 말자고.'
신박한 방어기제는 꽤 효과적이었고, 나는 일말의 부러움과 질투 없이 친구들의 경사를 축하해 줄 수 있었다.
숱한 항암치료를 하며 '난자 동결'을 권유한 주치의의 말에도
"결혼과 출산은 너무 먼 일이라 괜찮다."
며 거절했었다. 당장 한 치 앞도 모르는데, 언젠 생길지 모르는 아이를 위해서 힘든 치료전에난자를 채취하는 또 하나의과정을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그 결정에는 지금도 후회가 없다.
그 사이 기적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결혼을 했다. 남편은 아이가 없어도 상관없다 했지만 막상 결혼을 준비하면서 '그래도 너를 닮은 아이 한 명이 있었으면 좋겠다.'로 생각을 바꾸었다.
젊거나 건강했다면 (혹은 둘 중 하나라도 해당됐다면) 망설임 없이 임신을 계획했을 것이다. 하지만다른 사람들보다 그 과정이 두렵고 생각이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흔들리는 마음과는 별개로 결혼생활을 이어가며 우리를 닮은 자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고, 포동포동 알밤처럼 예쁜 조카들을 보면서 그 마음은 커져갔다.
늦은 나이에 자연임신이 쉬운 일이 아닌지라 가끔 초조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아이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순산하고 양육하는 일까지가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하늘에 맡기고 마음을 내려놓고 있다. 어떤 결과가 되든 분명 나에게 더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리라 믿는다.
살다 보니 하고 싶은 일은 점점 더 많아지고 꿈은 무한증식한다. 욕심일지도 모르는 그 목록들을 보면서 이 꿈들을 다 이룰 때까지 정말 건강해야겠다 싶다. 아프지만 않으면 천천히 하나하나 다 이루어나갈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적어도 시도는 해볼 수 있으니까. 내 삶의 모든 일들이 더 이상 건강에 발목 잡히지 않고 펼쳐졌으면 좋겠다.